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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Jul 11. 2020

문화마을 체험의 부작용이어라


 길찾기 어플에서 안내해주는 정거장에 내린 후 간신히 길을 찾아 좁은 골목길의 계단을 걷고 또 걸었다. 아니, 오르고 또 올랐다. 아뿔싸. 녀석은 이 길이 내리막인지 오르막인지는 모른다는 걸 몰랐다. 불볕더위에 정수리로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오르막 계단을 5분 정도 걷는다는 건 나로선 꽤 진 빠지는 일이다. 문제는 이런 길을 앞으로 10분은 더 걸어야 한다는 것. 원망의 눈빛으로 어플을 째려보았지만 이게 지름길이라 알려줬을 뿐이라는 듯 태연하다. 할 수 없이 택시를 불러 안 지름길로 돌아가려고 하는 찰나, 어플에서 알려줬던 또 다른 버스가 저 밑에서 마침 올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멈춰 서있는 곳이 버스정류장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작은 유리창으로 건물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긴 테이블에 앉아 모니터 화면에 열중하고 있는 J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은 그녀의 갤러리 겸 작업실이다.

 그녀가 그린 꽃그림들이 벽과 수납장 여기저기에 전시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이번에 주문했다는  캔버스가 크기별로 한 꾸러미 놓여있었다. 요즘 새로 배우고 있다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습작들도 보인다. 테이블 위에는 물감과 붓도 한가득 놓여있다. 코로나로 사람들이 뜸해져서 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겠지.


 함께 저녁을 먹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바깥은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고 우리도 2층으로 올라가 함께 쉬기로 했다. 지금껏 쉬었지만 더 본격적으로 쉬기로 했다. 허리까지 오는 낮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이랄 것도 없는 낮은 담장이 쳐져있는 2층 옥상이 있고 한 켠엔 드라마에서 본 듯한 자그마한 옥탑방이 자리하고 있다. 탁 트인 하늘에는 어느새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참 가파르고 작은, 오래된 마을이었다. 코로나로 발길이 끊긴 채라 아주 조용한 마을이었다. 헉헉거릴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고 또 올라 여기가 끝인가 싶으면 거기서부터 완만하게 잘 닦인 울창한 산책로가 다시 새로 펼쳐지기도 했다. 멀리 항구의 반짝이는 불빛이 아름다운 곳이었고 등 뒤 비탈진 산마루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의 불빛은 별빛만큼 아름답게 반짝이는 곳이었다.

 4계절 내내 태양빛에 반짝거리는 바다를 좋아하고 어둑어둑한 골목 곳곳의 감성 어린 불빛을 좋아하던 나 같은 사람에겐 이런 곳에서 수어개월 살아보면서 실컷 글도 쓰고 이 마을 작가들도 사귀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어디선가 허파에 시원한 바람이 드는 소리가 들린다.


3일간의 부산 일정을 무사히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후 문득문득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파스텔 그레이의 2층짜리 협소 주택이. 1층과 2층 정면에 시원스레 나있던 유리창이.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어 있는 건물 내부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보증금과 월세가 말도 안 되게 저렴한데 현재 비어있다는 사실이. 그래. 이건 신의 계시다.

 

바로 J에게 전화했다.

"거기 건물주분 연락처 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2층 건물을 운영해보고 싶은 마음이 또렷하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언니도 여기 내려오면 좋겠다며 J가 진지하게 건물을 보여줄 때만 해도 건성건성 소극적으로 훑어보던 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호탕하게 한바탕 웃던 J는, 그러나 이내 김 빠지는 소식을 전해줬다. 건물주가 이미 다른 사람과 이야기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그래. 잘됐지 뭐. 아직 때가 아닐 거야.


 그러나 한번 시동이 걸려 버린 이 놈의 의욕은 이미 우주 반대편 어딘가에 건물을 한 채 올린 듯했다. 올렸을 뿐만 아니라 오픈해서 절찬리 영업 중이다.


'자, 들어 봐. 이런 공간을 하나 운영해볼 거야. 독서하거나 개인 업무 하기 편하고 조용한 공간. 혼자 글 쓰러 오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공간을 꾸밀 거야. 그리고 나도 한쪽에서 같이 글 쓰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1층과 2층으로 구분되어 있는 공간이면 좋겠어. 그리고 마당이든 옥상이든 둘 중 하나는 꼭 있어야 해. 난 바람이 느껴지는 곳에서 글 쓰고 책 읽는 시간이 그렇게 좋더라. 상황이 허락한다면 주변에 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새소리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욕심이려나. 차가 쌩쌩 다니고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다니는 상권은 아니었음 해.

 그리고 말이지 아침엔 7시부터 문을 열고, 밤엔 12시까지 운영할 거야. 그 시간이 책 읽고 글 쓰기 제일 좋은 시간이더라고. 


1주일에 한두 번은 적은 숫자의 사람들과 책 이야기, 글 쓰는 이야기도 나누고 앞으로의 꿈도 나누고 싶어. 술보다는 담백한 티타임을 좋아하는,  이야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소소한 꿈에 대한 이야기 하는 걸 더 좋아하는 그런 심심한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이었으면 좋겠어. 가끔은 아주 아주 사적인 고민 이야기가 오갈지도 모르겠어. 그러면 그냥 담담히 들어줘야지 뭐.


 돈? 벌어야지. 암요. 내 나이가 얼만데.

그렇지만 솔직한 마음은 돈 같은 건 그냥 열심히 하고 싶은 거 하다 보면 그냥 알아서 뻥 하고 튀겨져서 들어오는 것이었으 하는 마음이야. 그냥 그렇다구. 오늘 공상은 여기까지.'


  어린 시절부터 남들은 꿈을 먹고 자랄 때 나는 공상을 먹고 자라며 '뜬구름 잡기 외길 인생'을 걸어오던 참이다. 참 외롭고 고독한데 중독성이 강해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오히려 심해지는 듯 해 사실 매우 당황스럽다. 


그렇게 나는 부산에서 또 하나의 뜬 구름을 낚아버렸다. 내가 낚인건가? 하 - 이래서 돌아다니면 안 되건만.


 그런데 나 지금 진지하다. 시답잖은 소리겠지만 난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공상은 자주 할수록, 구체적일수록, 그리고 집중할수록 눈 앞에 마주한 현실이 될 확률이 높다고. 내 비록 지금은 공상만 하는 신세다마는 분명 가까운 미래에 공상으로 뿌린 씨앗이 파릇파릇한 새싹이 되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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