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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Aug 27. 2020

포기가 이렇게 시원할 일인가요

간단한 요기를 마치고 에어컨부터 켰다. 덥지 않았지만 이후 일정을 위한 준비였다. 수납칸을 열어 오랜만에 라텍스 장갑도 꺼내 양손에 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살균수가 담긴 스프레이를, 한 손에는 도톰한 극세사 걸레를 잡고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엎드려 앉아 네 발 자세를 잡았다. 아차차.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검색했다. 상큼한 기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비긴 어게인 이수현 모음으로 클릭. 모든 준비를 마쳤고 본격적으로 오늘의 주요 일정인 바닥 손걸레질을 시작했다.


덧붙이자면 한 자리에서 적어도 5~10번의 걸레질을 하며 검은 땟국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닦아내는 클리닝 작업이다.  여기저기 눈에 거슬리는 물 얼룩이며 거뭇거뭇한 때자국들을 보면서도 그동안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날 잡아하는 걸레질 청소라 큰맘 먹고 하는 중이다. 잠깐 쉴 겸 중간중간 일어나 바닥을 점검해봤다. 역시나 반들반들해. 두시간의 노동을 바쳐 보송보송한 감촉을 산 결과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미루던 일을 하나 해결했다는 성취감은 보너스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중요한 결정을 하나 했다. 이제는 창업수업에도 더 이상 오지 말고 불확실한 계획으로 창업에 도전하지도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두 달 전, 우연히 발견한 문화 관련 창업 지원 사업에 신청해서 책방을 꿈꾸며 듣던 수업이었다. 수업의 내용은 뒤로 갈수록 사업성 계산으로 이어졌고 내가 가진 재원과 역량, 현실성 등을 다시 점검하며 시원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나의 고유한 기질이 또 한 번 발휘되는 순간이다. '포기하기로 최종 결정했으면 뒤끝 없이 빠르게'하는 내 유일한 기질.


책방의 실리가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되는 곳은 다 되고 할 사람은 다 한다. 사업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실 면밀히 따지고 보면 의지박약에 나태함이 더해진 내 실행력이 문제라는 생각을 해봤다. SNS의 발달로 단군이래 제일 돈 벌기 좋은 때라고 하는 이때에 어쩌면 더 연구해서 하기만 한다면 분명 승부수가 없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어제의 나도 참 게으르고 실행이 약했는데 오늘의 나도 여전히 그렇구나. 나이만 먹는다.


이렇다 할 승부수를 찾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가다 보면 길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막다른 골목에 처해보기 전에는 솟아날 구멍이 안 보이기도 하니까. 혹은 일단 한번 미친 척하고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도전하다 보면 어디선가 듣고서 '아, 단단히 미쳤구나. 구경 가야겠다.'하고 관심 가져 줄 사람이 모일 법도 하니 저질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 길도 야무지게 선택해보지 못하는 것은 그냥 두려워서겠지. 걱정이 앞서서겠지. 그래. 난 미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언제는 살 날이 며칠 없을지도 모르니 하고 싶은 건 다 하자고 겁도 없이 뛰어들더니 이젠 좀 살 만 하다고 앞뒤 계산도 하고 겁도 먹고 그러나보다. 나이도 먹고 간사함도 갖췄다.


그리고 하나 더. 내 눈에 허점이 보이는 이상, 이걸 그냥 덮어놓고 갈 수 없어서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다 결국 산으로 가버린 사업계획서는 내가 얼마나 쓸 데 없는 탁상형 완벽주의자인지 말해준다. 세상이 그렇게 계산대로 됐다면 지금 이러고 앉아있지 않겠지. 나이도 먹고 간사함도 갖추고 완벽주의자 흉내도 낼 줄 안다.


결국 수업도, 사업성도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다. 포기한다면 결국 나의 모순을 빤히 보면서도 고치지 않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기가 싫어 괜한 자존심으로 포기를 놓고 한참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은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어쨌든 현재의 나는 불확실한 일에 더 이상 머리 쓰고 싶지 않아하고 있었다. 이 어리광을 그냥 무시할 수도 있지만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고 이게 '나'라는 것을 먼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 실망하지 말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해주고도 싶었다. 나를 잃지 않아야 다음이 있을 테니까. 그때를 위해 지금은 거쳐가는 과정 중 하나거니 생각했다. 포기도, 실패도 여러 번 해봐야 다시 일어나는 법도 여러 번 배우게 되는 거니까.


그동안 밀린 일들을 하나씩 하려고 한다. 저녁엔 한동안 못 쓴 글도 다시 써야지. 내일은 긴 장마로 잘 마르지 못한 수건과 눅눅해진 이불을 싸들고 집 앞 세탁소도 다녀와야겠다. 건조기로 뽀송뽀송하게 마른, 기분 좋은 감촉을 느끼고 싶다.

뭔가를 포기한 후에 오는 이 시원함, 이 개운함, 나만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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