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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Dec 05. 2019

이게 뭐라고 왜 이렇게 좋은지

 한 달의 휴식기를 가지고 다시 독서방을 열었다. 그래. 독서방.

 만화방, 노래방, 놀이방처럼 정말 자유롭게 조용히 책을 읽는 독서방이라는 말이 맞다. 아무래도 말재주 없는 나로선 독서모임이란 걸 진행하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참여자는 여전히 한 명. 내 삶의 라이프스타일을 이곳에서도 너무나 잘 실현시켜 버렸다. 뭐 어떤가. 미니멀이 대세니 기죽지 말자.

쪼르르 몇 걸음 걸으면 나오던 모임 장소는 이사를 하면서 이제 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게다가 그 사이 날씨가 굉장히 추워지기도 해서 과연 내가 잘하는 짓일까 잠시 계산을 해봤으나 역시. 계산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내 꿈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이므로.


단 한 명의 참여자를 위해 낮부터 부지런히 준비했다. 가랑비가 살짝 내리고 있었지만 외출을 했다. 참여 신청 문자를 보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필사하기 좋은 미니 수첩과 부드러운 필기구 세트를 선물하기로 했다. 이 선물의 의미는 당연 '앞으로 계속 참여해주세요'의 뜻. 알아들으셔야 할 텐데. 회비가 없는 모임이라 사비를 털어 마련하는 거지만 천성이 좀 착한 탓에(?) 주는 기쁨이 충만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음 준비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독서 컨셉에 맞게 소품 준비도 해야겠다. 사람이 채울 온기를 대신해줘야 할, 막강한 책임감을 짊어진 것들이다.

 독서 소품에는 뭐니 뭐니 해도 책이 빠질 수 없으므로 책장에 있는 책을 몇 권 선정했다. 어디 보자, 색깔이 맞나... 오케이. 그런데 놓고 보니 저자가 다 외국인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 이러면 안 되지. 다시 목록을 재구성해서 네 권의 책을 골랐다. 고전 인문학 서적 하나, 현대 인문학 서적 하나, 스토리 풍부한 에세이 서적 하나, 그리고 가벼운 경제 서적 하나. 오늘 참여자의 연령을 추리해 봤을 때 나쁘지 않았다.

 소품으로 준비한다고는 했지만 이 네 권의 책은 집에 그냥 굴러다니는 책이 아니었다. 한 권 한 권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고 내가 감명받았던 내용이 있고 그 책과 나와의 추억 같은 것들이 있는 소중한 책들이었다. 나에게 각 책마다의 의미가 특별해서 조금이라도 돋보이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붓펜을 들었다. 빈 종이에 잠시 글자를 몇 번 써보고. 서랍 구석에 있는 책갈피용 종이들을 꺼내었다. 어디 실력 발휘 좀 해볼까. 각 책에 맞게 책을 빛내줄 캘리그래피 책갈피를 만들기로.

 캘리그래피 책갈피를 만들려면 먼저 문장을 뽑아야 한다. 이 책에서 어떤 문구를 뽑아야 하나. 특별히 감동적인 문구를 뽑으려면 오늘 안에 못 하므로 그냥 아무 데나 펼쳐서 제일 짧은 문장을 찾는다. 아는지 모르지만, 짧은 문장에 좋은 문장이 많다는 사실. 역시 말이나 글이나 많이, 길게 한다고 좋은 게 아닌 걸 여기서도 확인해본다.

 

 그렇게 뽑은 문장은 '하루라도 이 자리에 있으면 마땅히 하루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이황/ 퇴계의 사람 공부), '자연에 대한 인문학적 말 걸기, 어떤 의미인지 느껴지시나요?'(박웅현/ 책은 도끼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마라'(이노우에 히로유키/ 배움을 돈으로 바꾸는 기술), '결국 생각이다'(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이 정도. 나름 감명 깊은 포인트가 다 있다.

이렇게 문장을 뽑아서 정성껏 글자로 옮기다 보면 다시 그 문장들이 나에게 새겨진다. 이 시간, 참 좋다. 준비는 이 정도면 끝. 완벽해.

 

 어느덧 시간이 되어 밖을 나섰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숄더백을 어깨에 대각선으로 두른 후 한 손에는 오늘 준비물들이 담긴 파우치 가방을 하나 야무지게 들었다. 이렇게 길을 나서노라면 남들 퇴근하는 저녁 시간에 혼자 출근하는 기분이다. 내 일주일의 일정을 봤을 때, 누군가와 외부에서 목적이 있는 만남을 가지는 유일한 활동시간이기에 출근 기분 날 만도. 그런데 기분이 꽤 좋다. 이 돈도 안 되는 짓을 하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분홍분홍으로 물드는 그런 기분. 한 달간 쉬면서 컨디션을 잘 회복해서인지 내가 뭔가를 계획해 움직이고 있는(그게 뭐가 됐든) 이 시간 자체가 마냥 감사한 마음. 보통의 건강한 사람들은 알까? 사람이 꿈이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다. 건강하기까지 하다면 제일 큰 것은 다 가진 거다.

 

 모임 장소에 가기 전 잠시 슈퍼에 들려 오늘의 차도 준비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엔 핫초코가 운치 있지. 그렇게 핫초코 한 통을 사들고 여전히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오랜만에 도착한 장소. 20분 일찍 와서 아무도 없었다. 아, 이곳은 여전히 아늑하구나.

이곳 사장님이 준비해주신 작은 전기난로에 전원을 켜고 준비해온 소품들을 하나씩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그리고 아까 사 온 핫초코도 주방 테이블에 세팅 완료!

 그리고 이윽고 도착한 오늘의 참여자 한 분. 그렇게 오늘의 시간이 어색하면서 반갑게 시작되었다.


 눈에 띄는 볼거리도 없었지만, 공간을 채워주는 사람의 온기도 적었지만, 참 편안한 시간이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이렇게 편안한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이 별거 아닌 시간을 준비하는 내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행복이 채워진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새 꿈속 리딩샵이 예쁘장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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