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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Jan 20. 2020

시시하게 하나씩 열심히 이루어 보는 중입니다.

 비바람이 꽤나 치는 저녁이다.

연말이지만 들뜨거나 소란스러울 것도 없다.

언제나처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게 오히려 참신하게 느껴져 오늘도 세상 조용한 나의 아지트로 저녁 발걸음을 옮긴다.


 아무도 없는 깜깜하고 쌀쌀한 공간을 부드러운 조명과 귀여운 난로들을 놓아 따뜻하게 밝히고 주방으로 갔다.

오늘은 참석자분이 조각 케이크를 하나 준비해오신다고 하니 나는 향기 좋은 차를 준비해야지. 예쁜 잔을 세팅해놓고 전기 포트에 물을 담아 열을 올린다. 그리고 홀 가운데로 가서 의자와 테이블 배열을 맞춘다. 늘 다양한 모임들이 오가는 공간이라 올 때마다 테이블 세팅이 다른 탓에 매번 다시 정리한다. 덕분에 나도 다양한 연출을 하는 중이다.

오늘은 난로를 발 옆에 하나씩 두고 마주 보고 앉아야지.


 벌써 이곳에서 작은 모임을 하며 보낸 시간도 3개월이 지났다. 벌써 이렇게 됐나 싶지만 요양병원 퇴원 후 거의 바로 구한 공간이니 계산이 틀리진 않았다. 뭘 했다고 참.

임시로 빌려 쓰는 공간이지만 어떤 제약도 없었고 비용적인 어떤 부담도 없어 마음껏 잘 써 온 공간이라 그 사이 이곳에 정도 붙어버렸다. 


 하지만 이 모임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요즘 깊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내 목적은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서.


 내가 생각한 독서'모임'은 적어도 대여섯 명의, 그도 안 되면 둘셋 이상의 사람이 모여야 모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단독 면담도 아닌데 꼭 일 대 일 미팅 같아버리는 거다. 그러니 독서방이라는 거다.

 그렇다고 이 모임이 수익을 내는 모임이냐.

그럴 수도 없을뿐더러 그걸 꿈꾼 적 조차 없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들은 문의는 회비 있나요? 였다. 모집 문구에 회비가 없다고 명시를 했는데 말이다. 회비 없는 모임이라 시시한 걸 알고 더 안 오시나 보다.


 한 해의 마무리를 하며 새해 계획을 다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모임을 시작하며 조심스레 그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장기 참석자에게 건네 보았다.


"사실 저는 언젠가 작은 골목 책방을 운영해보고 싶어서 이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셋넷 모여서 좋은 내용은 서로 공유하는 그런 소모임을 가질 수 있는 책방을 가지는 게 제 꿈이거든요.

그래서 예행연습이다 생각하고 장소를 빌려서 이렇게 모임을 먼저 시작한 건데 생각처럼 잘 안 되네요.

다들 한 두 번 오시다가 안 오셔서 늘 이렇게 1:1 모임이 되어버리네요. 혹시 장기 출석자로서 개선했으면 하는 부분 이야기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솔직히 사람이 너무 없어서 심심하다, 장소가 너무 어수선하지 않냐, 책임자의 리더십이 너무 약하다 등등 뭔가 허심탄회한 말을 기대했다.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그러나 장기 출석자의 말은 전혀 달랐다.

"음. 저는 딱히 없는데요. 이 시간이 저에겐 힐링 시간이라 오는 자체가 좋아요. 저랑 취미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좋은 거 같아요."


 만족한다는 말에 왠지 모르게 김이 빠졌다. 이 썰렁한 분위기가 만족스러우시다니. 정말 그냥 이렇게 쭉 밀고 나가면 되는 건가.


 그녀는 내가 신경 쓰는 것에 전혀 신경 쓰여하지 않고 있었다. 한 명뿐인 적막한 분위기도, 필요 없이 광활한

장소도, 리더십이란 건 1도 보유하지 못 한 내 능력도. 그냥 이 시간이 좋단다. 학교 선생님으로,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로 지내는 일상 시간 속에서 이 시간이 유일한 힐링 시간이란다. 취미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아서란다.

며칠 동안 그녀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만나는 자리라 좋은 거였다. 이 장소가 좋아서도, 모이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아서도, 리더십이 매력적인 볼 만한 인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책에 집중할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이 좋은 거였다.

역시 독서방 단골다운 마음가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잊고 있었던 게 있었다. 사무실이 아닌 카페였던 공간을 찾은 이유, 작은 간식거리와 차를 준비하는 이유, 소소한 문구류를 선물하는 이유, 잔잔한 음악을 틀어두는 이유,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조용한 시간으로 꾸미는 이유를.

 이유는 하나였다. 잠깐의 시간이 되더라도 이곳에 있는 동안 편안하고 조용하게 '책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내가 그렇듯이 그들도 이 시간만큼은 좋아하는 글속에서 힐링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였는데 어느새 나는 '모임'이라는 이름의 구색을 신경 쓰다 본질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부족한 것만 보여 조금씩 실망하고 있었다.


 뭔가 뾰족한 수를 내서 개선해보겠다는 나의 의지는 이렇게 단골고객의 한 마디로 사르르 사라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독서방이면 어때. 이 공간이, 이 시간이 힐링이 되신다잖아. 그리고 가 원한 것도 그거였잖아. 그럼 된 거 아냐?

이거, 생각보다 꿈이 너무 빨리 이뤄져 버린거네.'


 너무 빨리 꿈이 이뤄져 버린 거 같아 시시한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소확행의 참맛도 누리는 법을 배워야 누릴 수 있다.

 시시하다면 시시한 거겠지만 작은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 큰 행복도 누릴 수 있을 거 같다. 오늘은 이 작은 행복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겠다.


 덕분에 새해 계획이 뚜렷해졌다.

독서방 컨셉으로 열 명 규모의 소모임으로 키워나가기.

잠깐. 열명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생각만 해도 심장 떨리는 숫잔데 다섯 명 소모임으로 줄일까.

하. 아니다.

꿈은 크게 가지랬다.

아... 소소한 내 꿈이여.

올해 내 그릇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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