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킴라일락 Feb 07. 2020

아무것도 아닌 시간의 아름다움

 그녀는 갓 서른이다. 여행이라면 통장의 잔고 따윈 생각하지 않는 프로 여행러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그리고 아닌 건 절대 아니라고 말하는 소신력, 인지도는 미약하지알고 보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뿜는 인디 뮤지션을 좋아하는 엔티크스런 취향까지. 절대, 결코 재미없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직장은 국립도서관. 말만 들어도 지루한, 그 이름도 지루한 '국립 도서관'이다. 게다가 그녀는 독서광이라고 주변에 소문이 자자하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 독서광 그녀는, 게다가 나처럼 에세이 추종자였다. 뭐 하나 공통점이 없어 보이던 그녀와 나는 그렇게 에세이라는 의외의 매개체로 서로 호기심을 가지고 통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비밀이라며 올해의 소중한 계획을 하나 고백했다. 녀석. 스페인 여행을 계획 중이라 스페인어를 공부 중이란다. 이런 추진력 하고는. 역시 프로 여행러답다.

 주변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소중한 자기만의 계획을 고백해준 그녀의 의리(?)에 보답하기 위해 어느 날 나도 그녀에게 나의 소중한 일과를 하나 고백했다. 사실 나는 주 1회짜리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있노라고. 이게 왜 홍보가 아니라 고백이 되었는지. 소심하고 찌질한 일상의 고백 앞에 웅장하고 대범한 계획을 고백한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자긴 그런 모임을 너무나 좋아하노라고, 진심으로 너무 가고 싶다고. 이런 의외의 반응이라니.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모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이걸 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곤란해했건만. 그녀는 정말 진심으로 책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도 그녀에게 올해의 소중한 계획을 하나 고백했다. 사실 나는 올해 독립출판을 공부해볼 계획이라고. 제대로 하는 건 없는데 이렇게 남들 한다는 건 다 해보고 싶단다. 그랬더니 이 녀석, 이번에는 대뜸 내가 멋있어 보인단다. 아, 괜히 말했다. 말해놓고 못 하면 어떡하나 벌써 걱정이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자네, 나와 같이 틈틈이 글 써볼 생각 없느냐고, 책 읽으면서 본인도 에세이 한번 써보고 싶지 않았냐고.

 그녀의 반응.

 "저도 쓰고는 싶은데 그런 거 해본 적이 없어서요."

이 발랄한 젊은이가 그런 풀 죽은 소리를 하다니 의외였다. 뭘 얼마나 잘 쓰려고 그러는지.

 "뭐야, 여행 다니면서 일기만 썼어도 벌써 책 한 권이겠네. 재밌을 거 같은데..."

그 흔한 여행기로 유인을 해보고자 했으나 역시 실패.

나도 그냥 다음을 기약하며 설득을 멈췄다.

그런데 불현듯 그녀가 말했다.


"에세이 읽으면 재밌긴 한데 그러다가 또 내가 이걸 읽어서 뭘 하나, 딱히 정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만 그냥 흐르는데... 그런 생각도 가끔 들어요."


뭔가? 이 진지함이 묻어나는 구어체들은.

그러나 그 진지함을 무시하며 가볍게 툭 받아치며 말했다.

"뭘 하긴, 공감하지. 그리고 소통도 하고 힐링도 하고 그러는 거지."

나의 성의 없는 말에 그녀도 대충 그렇긴 하다며 대화는 끝이 났다.

무성의하게 던져놓고 나도 그 말을 자꾸 곱씹었다.


이걸 읽어서 뭐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후, 나는 근처 도서관에서 에세이 두 권을 빌려왔다.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전 기다렸다는 듯이 활자들을 읽어가며 달달해하고 낮에도 가장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 휴식을 핑계로 책을 집어 들곤 했다. 그리곤 스르르 잠이 들고. 아, 이 쓸데없는 시간의 달달함이란. 읽어서 뭘 하는지는 아직 뭐라고 못 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주는 아름다움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모두가 무언가가 되려고 하고 되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건 이해가 될까. M양의 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시간'인 것 같은 에세이는 내가 부리는 일종의 '사치'다. 모든 사치가 그러하듯, 그래서 나에겐 그 시간이 더없이 아름답다.


 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누릴 자들을 모으고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제공할 글들을 모아 꿈꿔봐야지. 에세이로 가득 채워놓은 책방을, 모임을, 원고를.

 돈도 안 되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너무나도 명백한 나의 꿈들이라 슬프고도, 감사하다.


 < 윤동주 ㅡ 귀뚜라미와 나와 > 중


  

매거진의 이전글 시시하게 하나씩 열심히 이루어 보는 중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