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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Mar 19. 2020

나를 쏘옥 빼닮은, 내 사랑스런 시들에게

2019년 12월 14일


 아침


머리가 묵직한 신음을

소리 없이 내는 날.

거기에 더해

깊은 허기까지

느껴지는 날.

하지만 일어나 요리하기엔

어지러워 속상한 날.

가만히 벽에 기대앉아

감사한 기억들을

하나둘 떠올리며

하루의 문을 조심스레

열어본다.



        

 침대 옆에 늘 놓여있는 작은 수첩을 가져다가 아무 데나 펼쳐서 나온 메모 하나를 읽었다.

그래. 그랬었지. 내가 작년 연말까지만 해도 저런 모습이었지.


 암투병을 마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나 또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어지러움과 우울감, 전신 무기력 등으로 매일매일 기운차게 먹고 노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기운차게 시작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자주 침대에서 못 일어났고, 일어나서도 자주 다시 주저앉았고, 하루 중 꽤 긴 시간을 잠으로 보내야 하는 날도 꽤 자주였던 팔자였다.

 이 날도 그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컨디션이 에러인 하루를 직감하며 일어나길 포기했고, 얌전히 벽에 기대앉아 멀뚱멀뚱 뜬 눈으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런 날에 난 글이나 끄적이곤 했다.  


 여기까지 읽으며 이 작가는 여전히 비실비실한 일상을 보내고 있겠구나 하며 걱정은 마시라.

 더 나이 들기 전에 나도 좀 팔딱팔딱 거리며 움직이며 살게 해 달라고, 평소 안 하던 정자세로 바르게 앉아 한동안 비열하게 신에게 조른 덕분일까. 나는 올해 들어 신기한 체험들을 해가며 기하급수적인 체력 회복을 이루었더랬다.

그런 까닭에 불과 3개월 전에 쓴 저 순간은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다면 아주 희미한 기억 속의 어느 날로 사라져 버렸을 거다. 저 이쁜 생각이 사라졌을 생각을 하니 안쓰럽지 않은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가만히 앉아 감사한 기억들을 떠올린다니, 너무 이쁜 생각이지 않냐 말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무척이나 놀라운 컨디션으로 하루하루를 호랭이 기운으로 잘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저 날을 저렇게 남기길 잘했다고 생각 중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나의 감정을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에 간결하게 내 느낌과 생각을 위주로 짧게 짧게 그날그날을 쓰곤 했다. 딱히 규칙도 없는 운율과 삼삼할 것도 없는 수수한 문장으로 쓰는 메모지만 그냥 짧게 끊어서 쓴 짧은 글이니 시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쓴 시들은 벌써 수첩 다섯 권을 채웠다.  


내가 이 시를 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말하고 싶지만 마땅히 말할 사람이 없는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순간 느끼고 끝내기엔 너무 애틋한 마음이 들어 오래 간직하고 싶을 때, 아무도 없는데 혼자 많이 아플 때, 신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 때,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이 보고 싶을 때, 문득 모든 것이 너무 행복할 때 등등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그 상황이 그림으로 그려지게 글로 스케치하며 그 순간 느낀 감정을 한 줄 곁들이는 것.

그렇게 최대한 짧게 핵심적으로 표현해서 쓰면 구어체로는 잘 전할 수 없는 느낌이 고스란히 담긴 시가 한편 뚝딱 탄생한다. 참 쉽다.

 

 내가 훗날 다시 읽어볼 때 그 날의 그 순간이 언제인지 기억날 정도가 되면 되기에 너무 자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었다. 가끔 수첩을 꺼내어서 하나하나 다시 곱씹어보며 그 맛을 느끼곤 하는데 남의 일기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짧은 메모 시들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귀엽다. 투병기간을 보내느라 시작한 시이긴 하지만 투병이 끝나도 이 귀여운 글을 평생 쓸 생각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은 같은 일을 겪어도 그 순간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각자의 생김이나 개성만큼이나 다 각각이다. 그리고 나는 나라는 사람이 느끼는 참 별 볼일 없는 생각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편이다. 어떤 깊은 깨달음이나 위대한 생각, 특별한 감정이라고 할 수 없는 그 하찮은 것들이 내 일상을 지탱해주는 진짜 나이기 때문이다.

때론 그것이 우울하고 슬프고 망연자실, 실망, 자포자기 같은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그 또한 나의 모습이고 나의 인생의 한 순간이라 존중한다. 

그래서 내가 하루를 살면서, 혹은 어떤 일을 겪으면서 그 순간의 감정이나 생각은 어떠했는지를 기록한다는 것이 나에겐 즐거운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진짜 나'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니까.




 그런 까닭에 내가 하루 동안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꼭 기록하려고 하는 편이다. 별일 없는 보통의 날도 밋밋하면 밋밋한 대로, 수수하면 수수한 대로 그 나름의 평온이 감사하다고 느껴보고 그 순간을 기록하며 말이다. 물론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당연히 더 가슴 설레 하며 기록하게 된다.

그렇게 짧게 기록하면서 발견하는 것이 있다. 하루에도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정말 많다는 것. 그 감정들이, 생각들이 모인 것인 정말 진짜 나라는 것. 


 오늘 아침 문득 책방에 대한 공상을 하다가 공상 속 책방 한켠에 놓인 내 시집을 떠올려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를 쓰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고 그러다가 갑자기 수첩을 가져다 펼쳐보게 됐고 그러다가 갑자기 이 순간을 또 남기고 싶어 졌던 것이다.


이 순간을 시로 남겨볼까.

아니다.

오늘은 브런치에 이 순간을 걸어둬야지.

그동안 너무 이곳 활동이 뜸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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