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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 Mar 05. 2023

이해 대신 쓸 수 있는 마음들

무관심, 존중, 믿음

나는 이해심이 있는 편이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종종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거나 쉽게 오해하는 부분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표현의 형식보다는 담긴 내용과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보편적이지 않거나 관습적이지 않은 것에 거부감이 없는 편이다. 겉만 보고 고정관념에 의해 사고하기보다는 시간을 들여 들여다보는 게 좋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복잡성을 가진 매력적인 존재였다. 요컨대 이해심은 나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변화를 시도 중이다.



내게 너무 어렵다.


일단, 이해는 너무 어렵다. 자연스럽게 누군가 이해가 될 때 우리는 이해라는 행위를 자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느낀다.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수준을 넘어서서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단계에 이르면 많은 에너지가 든다. 내 사고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 보고, 내 몸에는 닿지 않는 상대의 상황과 감정을 느껴보려고 하면서 에너지가 소진된다. 피곤하고, 지치고, 인지적 과부하가 온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그럴 수 있을지라도 나머지 한두 번까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원래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게 에너지를 쓰고 있음에도 상대는 내게 더 기대하게 된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이해를 바라게 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럽다. 우리는 가끔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을 내가 편안함을 느낀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여기게 되기도 한다. 처음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편안하게 해주는 관계였어도, 한쪽이 바라는 이해의 범위가 넓어지면 다른 한쪽이 지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관계의 끝에서 너는 나를 이해할 줄 알았는데 라는 말이 너무 아프게 느껴진 적이 있다.


때론 적당한 선입견이 도움이 된다. 나는 선입견이 별로 없는 편이고 그래서 얻은 소중한 인연들도 있다. 내가 이해하고 경험한 삶은 온 세상에 비해 너무나 사소하고, 첫인상이 틀리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모두에겐 깊이가 있고 사람은 입체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에게 실망하게 될 때도 있다. 여전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너머에 담긴 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면 그 이상으로 애쓰고 싶지 않기도 하다.          



상대에게도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자연스러운 이해를 넘어선 이해는 오해에 가깝다.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이해할까. 기본적으로 내 안에 있는 재료를 가져다 쓸 수밖에 없다. 내가 겪었던 상황, 내가 느꼈던 느낌, 내가 겪었던 감정. 내가 가진 지식, 내가 가진 정보, 경험하고 이해한 세상을 기준으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아무리 그 이상의 이해심을 발휘하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초과해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상황에서의 이해는 깊은 오해에 가까워진다.


조금은 평가적이다. 이해는 이성으로 하는 것이다. 상황을 생각해 보고, 내 경험들을 돌이켜보고, 상대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분석적인 시선이다. 그런 이해의 어쩔 수 없는 속성 때문에 평가적인 태도가 함께 담기는 것 같다. 지금으로선 네가 이상하게 느껴지니, 생각을 깊게 해 보고 말이 되고 이해가 되면 받아들이겠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나 역시 누군가가 나에게 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라고 말을 한다면 마냥 기쁘게 들리지 않을 것 같다. 악의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인 선의가 가깝더라도, 이해하려는 태도 역시 어떤 의미에서 자기중심적이다.


무엇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너무 어렵다.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에 가깝다. 애초에 왜 누군가를 이해해야 할까? 상대를 위해서? 아닌 것 같다. 내가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그 역시 자기중심적인 태도일 수 있다. 애쓰고 노력해서 지치고, 상대가 더 바라게 되거나 사람에게 실망하게 되는 일 없이,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존중과 무관심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해심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좋은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나쁜 것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이고 평가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 되면, 나는 이해를 내려놓고 상대를 존중하기로 했다. 나는 상대방의 생애를 다 알 수 없고, 무엇보다 상대방처럼 느낄 수 없다.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없으니 같은 방식으로 사고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꼭 상대를 이해해야만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온 삶과 생각하는 방식과 느끼는 방식을 존중한다. 그게 그 사람이니까. 내가 나인 것처럼. 애초에 그거면 되는 거였다. 나의 이해력 바깥에 있는 그의 그다움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물음표는 없다. 어렵더라도 그렇게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해받기보다는 존중받고 싶다. 우리는 어쨌든 자신을 대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게 되고, 타인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싶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잘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못하는 편이라 괴로울 때가 종종 있었다. 싫어하는 사람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받은 부정적인 느낌을 무시하는 행동 같기도 하다. 애초에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모든 사람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 우리는 모두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쉽지 않아서 무관심하기로 했다. 해보니 이 역시 이걸로 충분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아무튼 에너지가 든다. 미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 훨씬 편하다.


사실 무관심도 타인에게 쓸 수 있는 꽤 좋은 마음이다. 우리는 가끔 나에게 아무 관심 없는 사람을 가까운 사람보다 더 편안하게 느끼기도 한다. 무관심이라는 태도가 존중과 꽤 닮아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나를 미워하는 대신, 내게 무관심하다면 좋겠다.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대로 타인을 대한다.


사람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똑같이 대한다.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많다. 세상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어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는 사람을 뻗게 만든다. 그러니 보이는 것을 봐야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하고, 느껴지는 것을 느끼고,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을 추구해야지.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존중하거나 무관심하고 싶다. 그런 태도로 살아가다 보면 시간으로 증명된 믿음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아직까지는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내게 값지기는 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운다. 이런 사람이 나인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변화하고 싶다고 느꼈고, 변화를 시도 중이다. 나의 경험상 내가 변하면 세상도 함께 변했다. 나는 변화를 시도 중이다. 어떤 세상이 따라올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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