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저포기’
사이코스 에세이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를 읽고
* 님을 위한 진혼곡
얼마 전 김어준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기자는 김어준을 ‘직업이 김어준이다’라고 소개를 했다. 이거야 말로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나에게는 김시습이 그렇다. 뚜렷한 사회적 지위도 없이 산천을 떠돌며 문사로서 살다 간 김시습, 직업이 김시습이었다. 김시습에 처음 매료된 것은 <만복사저포기>를 통해서였다.
만일 할 수 있는 게 글을 쓰는 일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쓰겠는가??
그 인물이 김시습이라면 그는 무엇을 썼을까?
산천을 유랑하며 김시습은 무엇을 보았길래 <만복사저포기> 같은 작품들이 나왔을까?
1. 김시습
김시습은 계유정난을 계기로 책을 불사르고 방랑의 길을 나선다. 그때 나이가 21세였으니 그때까지 그가 본 세상은 아직은 좁은 세상이었다. 어릴 때는 국가가 주목하는 천재로, 커서는 성균관 유생으로 자랐으니 그가 아는 세상이란 책과 그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듯하다. 그런 그가 계유정난을 계기로 전국 산천을 떠돌아다닌다. 이때 그는 승려의 모습으로 떠돌았다고 하는 그의 회고도 있다. 민중들의 삶 속으로 비로소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애민의 정신이 가득 차 있는 작품들이 많다. 이때의 애민은 지식인들이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동정이나 시혜가 아닌 자신이 직접 발로 현장을 누비며 획득한 주권의 원천으로서의 애민인 것이다.
‘인민이 자기 생산물에서 십 분의 일을 바치는 이유는 군주가 총명함을 발휘하여 자신들을 잘 다스려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음식상을 받으면 인민이 자기처럼 잘 먹고 있는지, 옷을 입으면 인민도 자기처럼 잘 입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궁궐 안에 있을 때에는 만백성이 편안히 지내고 있는지, 수레를 타고 나가서는 만백성이 평화롭고 경사로운지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네가 입는 옷과 네가 먹는 음식은 인민의 고혈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하여 군주는 평소에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미안하고 가엾은 마음이 드는 법이다.’
- 인민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중에서
김시습의 의식에는 진혼에 대한 남다른 감수가 있었다. 단종이 죽은 이듬해 봄에 동학사에서 단종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사지가 찢겨 죽은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담아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했다고도 전한다.
외침을 겪을 때 가장 피폐해지는 것은 민중들의 삶이다. 그중에서도 여인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외구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재산 약탈과 부녀자 겁탈이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은 의지가지없이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양생) 그러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한으로, 전설로 전국 방방곡곡에 스며 있었을 법하다. 전국 산천을 떠돌며 감수성이 예민한 김시습은 그러한 민중들의 얘기를 직접 듣고, 삶을 보고 가슴으로 담았을 것이다.
2. 님을 위한 진혼곡 (만복사저포기)
남원에 사는 양생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아직 결혼도 못하여 홀로 만복사 동쪽 방에 살고 있던 청년이다. 어느 날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에게 저포놀이를 해서 이기면 어여쁜 배필을 얻게 해 달라고 빈다. 저포놀이에 이긴 덕인지 법당에 어여쁜 미인이 들어오고, 둘은 남녀의 연을 맺게 된다. 만복사에 나타난 이 예쁜 여인은 열대여섯 쯤 되는 소녀로 왜구 침입 때 목숨을 잃은 귀신이었다. 이 소녀는 양생에게만 보일 뿐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 소녀뿐 만 아니라 정씨, 오씨, 김씨, 유씨 소녀 역시 같은 또래의 비슷한 죽음을 맞이한 소녀 귀신들이다. 이 소녀들은 죽은 자의 세계로 흩어지지 않고 산자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그녀들을 이 세계에 잡아 놓고 있는 맺힘이 무엇일까?
쌀쌀한 봄추위에 명주 적삼이 얇구나
몇 번이나 애태웠던가, 향로 불 식어가니
저문 산은 검푸르게 엉겨 있고
저녁 구름은 우산처럼 펼쳐져 있네
비단 장막 원앙 이불 함께할 임이 없어
금비녀 비껴 꽂고 퉁소를 불어 보네
애달파라, 세월은 빨라
마음속에 번민만 가득
소녀가 원하는 것은 ‘비단 장막 원앙 이불 함께할 임’이다. 소녀의 맺힌 한과 양생의 소원이 만나 그들은 서로의 짝이 된다. 주고받는 시 속에는 그들의 애틋함이 담겨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양생이 소녀의 진혼제를 지내고 소녀의 억울함을 달래 준다. 또한 이 소설에서 다른 소녀들의 모습들은 모두 정갈하고 지체 있는 집안의 여식으로 묘사된다. 이는 죽은 자를 높이는 전형적인 진혼의 모습이다.
‘진혼’은 의식을 통해서 묶여 있던 어떤 것에서 풀려나고 해방되게 하는 제의이다. 이루지 못한 꿈으로 인해 맺힌 한이나 억울함으로 인해 고인 한이 제의를 통해서 풀려나고 풀려남으로 인해서 새로운 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과거의 꿈과 억울함은 소녀를 가두는 족쇄로 작용하지 않는다.
양생과의 만남과 제의를 통해서 과거의 족쇄에서 풀려난 소녀. 그녀에게는 새로운 존재자로의 변이가 일어난다. 그녀의 변이는 극적이고 파격적이다.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치욕을 겪었던 땅을 벗어나, 치욕을 겪었던 여자의 몸이 아닌 남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p30
“당신이 지성을 드려 주신 덕분에 저는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승과 저승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당신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편 재를 지낸 양생은 이후 결혼을 하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생을 살아간다.
양생 또한 소녀와의 만남은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 없게 한다. 오직 그에게만 보였던 소녀, 즉 오직 그에게만 일어났던 은밀한 교감은 오직 그만을 변화시킨다. 그런 그가 다시 이전과 같이 사람들 속에 섞여서, 이전의 사유방식으로, 이전의 사회 속에서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삶을 떠나 새로운 곳(지리산)으로 간다. 이런 떠남은 현실도피나 은둔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와 거리를 두는 것은 수동적 행위가 아닌 능동적 행위인 것이다.
이렇듯 <만복사저포기>는 나에게는 청춘들을 위한 진혼곡으로 다가왔다. 마을마다 산천마다 스민 비극은 발로 전국 곳곳을 누빈 김시습에게 어떤 식으로든 다가왔을 것이다. 그 비극성이 그의 개인적인 소외와 더불어 그의 작품에 때로는 사랑의 모습으로 때로는 염부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리라. 특히 <만복사저포기>는 일찍 부모를 잃은 양생과 전쟁 중에 스러져간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아, 외부적인 요인으로 최악으로 내몰렸던 그 시대의 청춘들을 위한 김시습의 진혼곡은 아니었을까..
다시 한번 묻는다. 만일 할 수 있는 게 다만 글을 쓰는 일이라면, 나는 무엇을 쓸 수 있을까?
https://youtu.be/ts6pc6sq3gk?si=VnC2AuMWnsHiwl7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