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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un 22. 2024

10년을 걸었지만, 막다른 길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림을 그만둘까, 말까. 

‘그림을 접을까?’ 

작년에 내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한 해를 보냈다. 좀 쉬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다녀온 치앙마이 한달살이로 일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새로운 내가 되고 싶어서 이것저것 시도해 봤으나, 결국 비슷한 한 해를 보내고 말았다. 그럭저럭 보낼 수 있는 건 정말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베이글처럼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가는 기분으로 계속 지낼 순 없었다. 나는 여기까진가 봐요, 주변에 힘든 마음을 드러냈더니 공감과 위로의 말을 들었다. 약간의 기운을 내서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 스스로 물었다. 글쎄. 열정이 바닥나고 나니 더 이상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그림을 그만두면 지금껏 버티고 살아온 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고 나라는 사람은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다. 하아. 


새해가 들어 새 사람이 되고 싶어 단식을 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는데 다시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슬슬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미뤄둔 파일 정리를 시작했는데, 너무 하기 싫은 일이라 처음엔 1시간만 하자는 생각으로 했다. 단순노동이라 여겼더니 기준을 세워 분류하고 옮기고 지우는 일이 이상하게 복잡하고 고단해서 두 시간 이상 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자꾸 추억으로 빠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물건이든 파일이든 강단 있게 버리지 못하는 탓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가진 건 시간뿐이라 서두르지 않고 하나둘 정리해 나갔다. 헌책방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책들을 하나하나 쓰다듬고 먼지 털어 다시 책장에 꽂아주듯이 여기저기 섞여 다시 열어보기도 싫은 폴더를 하나씩 열어 순서대로 정리했다.


파일 속에 지난 작업을 다시 보니 창작욕이 슬그머니 생겼다.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서 작은 싹이 하나 돋아난 기분이었다. 여기저기 처박혀 있던 그림 조각들이 '지금 그만두기엔 조금 아쉽지 않아?',라며 되물었다. 아 그러게. 끝내더라도 이것까지만 작업해 볼까.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는 책들이 나를 슬며시 붙잡았다. 마무리를 하자. 어쩌면 이소의 마지막 작업이 될지도 모르겠군. 흠. 마지막 이소라. 이소는 내가 독립출판을 만들면서 작가로서 새로운 자아가 필요해 만든 작가명이다. 이 이름과 함께 희로애락을 겪었는데 송별회도 안 하고 떠나면 좀 서운할 것 같기도 하다.   


계속할까, 말까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파일 정리에 몰두했지만, 3개월째 접어들자 좀이 쑤셨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파일 정리만 계속한 것도 벌써 지독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나에게도 약간의 인간미가 있어 벚꽃이 피고 봄이 오자 마음이 들떠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고 싶어졌다. 그런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생각했기에, 그러면 돈이 되는 그림은 무엇일까 매일 생각이 바뀌며 우왕좌왕하는 시기를 보냈다. 그런데 그때 때마침 강연 제의가 들어왔다. 말재주가 없어 강연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지난 시간 독립출판을 만든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면 어쩐지 할 수 있을 거 같아 수락했다. 성공한 작가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버텨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개월의 시간이 이 강연을 위한 시간이었나 싶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신기해했다.


아, 그렇담 더 열심히 해야지. 대충 마무리하려고 했던 파일 정리였는데, 강연을 앞두니 더 촘촘하게 파일을 살폈다. 매해 어떤 마음으로 작업했는지 발표 자료를 만들며, 연표도 그리고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단순 파일을 정리할 때랑은 또 다른 의미의 정리였다. 기록이든 정리든 그걸 자꾸 곱씹으며 회고해야 비로소 의미를 찾는 듯하다. 독립출판을 시작한 지 10년 차, 이소로 활동한 지 5년인데. 대략 5년을 주기로 나의 한 시즌이 완성되는 건가. 이직을 앞둔 직장인처럼, 이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이소를 잘 정리하고 새로운 시즌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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