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를 아시나요
나는 올해 신작을 만드는 일을 멈췄다. 외부 행사들도 참여하지 않는다. 자발적 일시정지. 어느 순간부터 책을 만드는 일이 관성처럼 느껴졌다. 해야 하니까 하는 일. 그런데 독립출판을 만드는 일은 누군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직장처럼 해야 하는 일로 여기는 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분이랄까. 이렇게 계속 가다간 그냥 독립출판 계에서 고인물이 될 것 같… 아니 이미 그럴지도. 이제는 독립출판물을 보며 예전처럼 가슴이 뛰지 않는 내가 솔직히 실망스럽기도 하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시작했는데, 사랑의 열기가 식으니 어딘가 잘못된 기분. 이제는 설렘의 기간 너머의 다른 단계로 넘어가야 할 단계인가 보다. 그건 무얼까, 나의 미션은 무엇인지 고민이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 쉼을 갖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자발적 멈춤처럼 보이지만 사실 힘이 달려서 멈춰졌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다. 작년부터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정지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연료가 다 떨어져 번아웃. 올해는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아니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막상 북페어 참가 신청 공고를 보니 이래도 되는 걸까, 매번 하던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니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듯하다.
독립출판물을 시작하며 애초에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게 잘못이었을까. 지금의 번아웃의 원인을 검토해 본다. 10년 차, 10년을 했는데도 최저임금도 못 받는 처지라니. 어디 가서 부끄러워 말도 못 꺼낸다. 사회초년생의 월급 정도만 벌어도 좋을 텐데. 검색해 본다. 다들 얼마 벌고 사는 거야. 2023년 사회초년생 연봉은 3396만 원이라고 한다. 하. 그 정도만 되어도 나는 부자가 된 거 같은 기분이다. 잠시만, 그렇담 나와 비슷한 나이의 직장인 친구들은 얼마를 버는 거지. 10년 차는 평균 5500만 원이라고? 정말? 하… 더 보지 말자. 나는 바보 멍청이. 뭘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살았을까.
이런 현실을 깨달을 때마다 정말 타격이 크다. 그래도 슬픔에 빠지면 더 도움이 안 되니 정신 승리하려고 애써본다. 일거리가 없어 1원 한 푼 못 번 날에도, 그래 오늘 파일 10개 지웠으면 참 잘했어. 오늘 만 보 걸었으면 훌륭해. 두 다리가 건강하고 잠 잘 곳이 있잖아. 이런 식으로 괜찮은 척하지만 뒤돌아선 유튜브에서 돈 버는 방법을 검색하며 나의 욕망을 숨긴다. 어느 날은 이모티콘을 해야 해, 다른 날은 블로그도 늦지 않았대! , 또 다른 날은 얼마 없는 돈이지만 이걸로 투자를?! 이러면서. 그러나 그 무엇도 시작 못하고 팔랑거리는 귀로 매일 다른 곳을 배회했고, 많은 것을 알면 똑똑해질 줄 알았는데 불면이 찾아왔다.
그래도 뒤죽박죽 엉킨 잡 지식 속에서 지금 상황을 일컬을 단어 하나 발견한 건 큰 소득이었다. (여기서 소득은 물질적이 아닌 정신적 이익이라는) 어느 콘텐츠에서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다양한 활동을 시도해 보는 시기를 ‘갭이어'라고 부르는 걸 보았다. 원래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전에 다양한 경험을 쌓고 본인의 진로를 탐색하는 시기를 말하는 거다. 그런데 요즘엔 직장인이나 사회인들로 범위가 넓어진 듯하다. 갭이어라는 말이 맘에 들었다. 번아웃, 방황, 무기력, 우왕좌왕, 경력 단절 이런 말과 다른 밝은 분위기를 풍겼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건 아닌가 걱정했던 시간이었는데 '갭이어'라 이름 붙이니 꽤 그럴싸해졌다. 나는 이제 ‘독립출판 제작 10년 차 유명하지도 않으면서 최저 임금도 못 벌고 방구석에 있는 중'이 아니라 '독립출판 제작 10년 차에 나를 돌아보고 자신에 대해 이해하는 중 (아마도 앞으로 잘 될 거임)'인 거다. 흠. 말의 힘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