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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 Dec 26. 2022

'가까스로' '꾸역꾸역'

예능PD이자 엄마이자 나로 사는 중

가까스로 꾸역꾸역.


최근에 내가 많이 하는 말을 돌이켜보았는데

“가까스로” 와 “꾸역꾸역” 이었다.


누가 ‘아이 키우랴 일하랴 바쁘지’ 하면 “아이구 가까스로 하고있습니다” 

‘요즘 어떻게 살아’ 하면 “아이구 꾸역꾸역 살고있죠 뭐” 

자판기처럼 대답이 튀어나온다.


놀 땐 P요 일할 땐 J인 나는, 자고로 계획없이 좌충우돌 놀다가 일할 땐 착착 계획된 리스트를 깨는 맛으로 살아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나는 지금 13년차 예능PD고 5살 2살 된 딸들의 엄마이기도 하다. 이것만으로 이미 해야할 일들이 엄청 생겨난다. 하지만 나는 하필 하고픈 게 많은 성격이다. 


일주일에 세번 운동도 하고싶고(이건 생존을 위한 필수라고 봐야함) 피아노도 치고싶고 여행도 가고싶고 영화도 보고싶다. 아참참, 예능프로그램 모니터링도 해야하고 넷플릭스도 봐야하고, 생각해보니까 내일아침 애들 반찬도 만들어야하고 애들 독감주사는 맞혔던가? 이번주에 회사연수도 가야하고 그시간동안 육아대타를 구해야하네? 이제 네 명이니까 여름휴가 티켓팅은 미리 해두자, 오늘 항공사 홈페이지 잊지말기!!! 맞다 어제 남편이 겨울외투 하나 골라달라고 하던데, 아 내가 사이즈교환한 겨울부츠는 왜 안오지? 저녁엔 부동산 보러가기로 한 거 잊지말자, 그러면 내 병원예약은 어쩌지 한번만더 미루면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 같은데......


하 

또 샜다.




무슨 생각이라도 할라치면 해야할 리스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삶. 이런 삶을 나는 지금 살고있다. 예능 PD로서의 정체성과 엄마의 정체성은 뒤섞인 지 오래다. 그 사이에 ‘취미부자’와 ‘행복해지려는 나’와 ‘자유롭고 싶은 나’까지 수시로 챙겨달라고 비집고 나온다. 


그래서 나는 “가까스로” “꾸역꾸역” 살 수 밖에 없다.




사실 내가 지향하는 건 “여유있게” “착착 계획한대로” “능동적으로” 사는거다. 그게 폼도 나지않나. 하지만 방금 목격했다시피 지금 나의 삶은 틈만 나면 온갖 리스트들이 추격해오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저 데드라인이 닥친 일들을 잊지않고 가까스로 해내기만 해도 감사하다. 진지하게 머리를 굴려봤는데 정말 방법이 없다. 24시간 육아를 대신해줄 마음 따스한 AI가 생겨나기 전에는. 그렇다면 결국 한동안은 “가까스로” “꾸역꾸역” 살아야 한단 건데...




이 폼나지않는 “가까스로” “꾸역꾸역” 사는 삶에 대해 다시 바라보기로 했다. 


회사에서 물먹고 우울해하고 싶은데 딸들이 지들 맘대로 파고들어 “엄맘마 사랑햄마마” 하면 폼나게 우울해할 틈도 없는 삶, 추울 땐 넷플릭스나 보고싶은데 애들에게 떠밀려 어느새 첫눈을 밟으며 좋아라 하고 있는 삶, 인스타 좀 볼라치면 어느새 뽀로로 음악을 틀고 몸을 흔들며 진심으로 신나 하고 있는 삶, 게으르게 보내고 싶은데 눈떠보면 활기차게 노느라 주말이 순삭되어 있는 삶, 딸들을 무릎에 앉히고 그림동화책을 읽다가 내가 감동받아 우는 삶, 라면이나 끓여먹고 싶은데 어쩔 수없이 삼시세끼 가정식을 만들어먹고 건강해져버린 삶......


시간에 쫓겨 할일에 쫓겨 가고만 있는데 지나온 길들을 바라보면,

나쁘지 않다. 

아니 썩 좋은데? 


그래서 나는 더이상 “정다히” “훌륭한 엄마” “멋진 예능PD”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눠 살지 않기로 했다. 뒤섞인채로 오늘도 “가까스로” “꾸역꾸역” 살아보기로 했다. 분명 하루하루는 엉망일 거고 아 오늘도 억지로 넘겼다 싶을건데, 언젠가 인생에 서글플만큼 무료한 순간도 온다는 사실을 우린 알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대로. 밤에는 사색할 틈도 없이 곯아떨어지는 삶을 살아보자. 




이 글은 나처럼 뒤죽박죽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엉망진창으로 끝난 하루가 썩 맘에 들진 않지만 또 꾸역꾸역 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 꾸역꾸역의 다른 이름은 아마도 성실성일 것이다. 그래도 해내는 힘. 나는 꾸역꾸역 보낸 하루의 힘을 믿는다.


내 눈엔 의도대로 잘 가꿔진 정원보다 마구 줄기와 가지를 뒤엉킨 숲이 더 아름답다. 비바람이 칠 때도 태울듯한 해가 비칠때도, 가물 때도 꾸역꾸역 그 시간을 버텨냈기 때문이다. 그 안에 더 다양한 생명이 움튼다. 


지금 내 안엔 뭐가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꾸역꾸역 가까스로 보낸 하루들이 지나가면 아마 꽃을 볼 수 있을거다. 우리는 아마도 잘하고 있다!




어느날은 사원증을 찾는데 기저귀가 튀어나온다; 뒤죽박죽 된 사이에서 정체성 유지하기가 쉽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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