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쯤 잠에 들었다.
깨질 듯한 두통에 잠에서 일어나니 오후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오전, 오후로 실외배변을 해야 하는 강아지는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며, 휴대폰 하나 올려놓을 수 없이 지저분한 식탁이 나를 기다렸고, 며칠 전 개수대에 넣어두었던 접시가 그대로 나를 반겨주었다.
오늘은 영어 수업을 할 수 있냐는 과외 선생님의 메시지에 못할 것 같다는 답장과 함께 깨달았다.
조울증이 다시 돌아왔구나.
노트북을 열었다.
듣다가 만 인터넷 강의 창과 사이버 대학 편입 원서 확인 창이 켜져 있었다. 2주 뒤면 시작해야 할 자격증 실습 관련한 창들도 한가득이었다.
더 조여 오는 머리의 압박으로 노트북을 닫고 휴대폰을 열었다. 휴대폰 화면엔 각종 수업과 약속으로 가득 찬 캘린더가 나를 바라보길래 다시 침대로 누웠다. 눈을 떠 휴대폰을 보니, 오후 4시가 넘었다.
얼마 전, 친구들과 지난달부터 잡아놓았던 약속이 취소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가족이 있는 인천에 가면 언제나 괜찮아졌으니까 '인천에 갈래?'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애처로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에 나왔다.
배변봉투가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강아지가 한번 더 배변을 보게 되었다.
화가 났다. 다 그만하고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렇게 집에 들어와 어제 넣어놨던 가득 찬 세탁기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애인이 퇴근을 하고 내가 사는 집으로 왔다.
나는 그의 품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겨 있었다.
퇴근 후,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바쁜 그의 등 뒤에서 가만히 읊조렸다.
"나, 조울증이 다시 온 거 같아."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앉힌 뒤, 괜찮다고 쓰다듬었고 이윽고 나는 이유도 모를 눈물을 흘렸다.
어떤 상황과 상태를 인지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는 말을 종종 했었다.
못 하는 걸 인지했을 때,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다른 길을 찾거나 더 보완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으니 축복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흔히 말하는 골든타임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지가 정말 축복일까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어떤 드라마에서는 망각이 신의 축복이라고 하는데, 인지하지 않고 '컨디션이 조금 안 좋나 보다'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다들 참아내며 살아가는 건데 사실 내가 약해서 인지를 축복이라 방패 삼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어쨌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모든 것에 열의를 띄던 내가, 갑자기 잠이 많아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숨어버리고 있는 걸 보니 나의 인지레이더가 발동했다.
지금, 조울증이 다시 너를 삼키려고 하는 것 같다고.
이내 평소 가던 병원을 검색하다가, 저녁 메뉴를 냄비에 넣어놓기만 하고 맨바닥에 누워있는 나 대신 가스불을 올려주는 애인의 손을 잡고선 검색창을 닫고 메모장을 열었다.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고작 이 아홉 글자를 적어 내리는데 눈물이 펑펑 흐르지만 나는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이는 겨울에, 빨갛게 어는 두 뺨과 손가락에도 따뜻한 붕어빵 하나 쥔 것으로 쉽게 미소 지을 수 있었고,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 까먹는 귤과 달달한 딸기에 행복할 구석을 찾아내던 나는 언제나 그랬듯 다시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이번 겨울이, 유독 내게 참 춥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돌아오는 봄은 내게 꼭 따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