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하는데 몰두하다 보면 이것을 누군가가 사용한다는 생각을 종종 잊을 때가 있다.
디자인이 산으로 가는 데에 제동을 걸어주는 것, 그것은 사용자이다. 가방은 오브제가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패션 아이템이면서 실제 용도가 있는 생활용품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방 디자인을 할 때 필히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포켓을 하나 달더라도 그것을 넣을지 말지 결정할만한 ‘기준’ 같은 것 말이다. 모호하게 감으로 결정하기보다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지 정리해놓으면 다양한 디자인을 하더라도 일관된 태도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으로 (마케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가방 디자인 3대 요소라고 할 수도 있겠다. 스스로도 거창하게 들리지만 긴 시간 이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디자인을 할 때 유념해야 할 것들을 리스트로 만들었는데 그 요소들을 어떤 균형으로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디자인의 방향이 결정되었고 그동안의 시간이 증명해준 점도 있으니 나름 단단한 기준이 생긴 셈이다.
초반, 나름대로 지표로 삼았던 마음가짐은
1. 새로울 것
2. 아름다울 것
3. 편리할 것
4. 기어쓰리 다울 것
매번 이 4가지를 상기하며 디자인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은 ‘하고자 하는 디자인’과 ‘사용하는 사람의 편의성’ 그 사이에서 가장 이상적인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첫 번째는 항상 멋있고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그 정도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선에 맞춰야 했고 그 균형을 얼마나 세련되게 구사하는지가 스스로에게 늘 과제였다. 그리고 그 ‘세련된 균형’에 대해 우리 브랜드의 언어로 일관되게 이야기해야 했다. 그게 브랜드의 정체성이고 힘이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아름다움(심미성)과 실용성 그리고 브랜드 아이덴티티, 이 3가지 요소를 어떤 밸런스로 디자인하는가’가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우선은 각각의 요소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1. 심미성
디자이너 대부분은 못생긴 것을 두고 보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한다.(나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이때 ‘못생겼다’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영역도 있겠지만 상당히 개인적인 영역이고 그래서 심미성은 디자이너의 호불호와 깊은 연관이 있다.
디자이너라면 어느 정도 취향이란 게 있을 텐데 그것에 관해 스스로 깊은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단순히 좋다, 아름답다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한 집요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은 유년기의 경험과 결부되어 있는 뿌리 깊은 취향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거나 혹은 그저 유행이라 많이 접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취향의 이유와 거기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불호’의 구체적인 이유, 이게 한때의 ‘호’인지 변할 여지가 있는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자신에 대해 들여다보고 탐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디자이너의 취향은 디자인을 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간과하기 쉽다) 결국 이것은 ‘자기 인식’ 이 얼마나 이뤄졌는가와 큰 연관이 있는데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디자이너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디자인을 한다는 게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 이는 ‘진짜’ 자기 취향을 가지고 ‘진짜’ 디자인을 하는 시작점이 된다. 여기서 ‘진짜’ 란 주체성과 오리지널리티를 의미한다. 그리고 자기 인식은 본인의 브랜드를 만드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자기 자신을 깊게 탐구하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관심과 시대적 흐름을 읽기 위한 노력도 필수이다. 나의 정체성은 외부 세계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동시대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나의 취향이 세상과 시대적 요구를 만나는 지점. 거기서 공감 가능한,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 나온다고 믿는다.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와 공부. 그것이 바탕을 이루고 있어야지만 내가 보고 듣고 접하는 것을 깊은 호흡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심도 있고 좋은 취향이 쌓여간다. 그리고 그것이 작업으로 발현된다.
아름다움은 단순히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의 총체인 셈이다.
2. 실용성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늘 그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한다. 그래야 사용할 수 있는 가방이 나온다.
사용자의 삶을 상상해보자. 그 사람의 하루, 동선, 이동수단, 사용하는 물건들, 옷차림까지. 어떤 상황에서 가방을 사용하고 거기에 무엇을 넣을지. 그들은 가방에 무엇을 기대하고 우리는 사용자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그리고 가방을 사용하는 나 자신과 타인의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해본다. 여러 기능을 넣는다고 편의성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만큼 적재적소에 넣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과한 디테일과 기능은 가격만 높일 수 있다. 실제 제품을 사용한 고객의 피드백을 듣는 일도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우리가 기대한 대로 사용하는지 혹은 그렇지 못한 지.
예전 우리 가방은 트랜스 포밍, 그러니까 한 가방으로 다양한 연출을 할 수 있는 게 특징이었다. 끈을 하나 더 달아주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다른 가방처럼 보이게 했는데 각각의 형태로 바뀌는 것에 억지스러움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피드백을 들어보니 이것을 100% 활용하는 사용자는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처음 구매할 때는 그런 디자인적 특징이 매력적이었지만 실제 쓰면서 자기에게 맞는 한 스타일로 고정해놓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트랜스 포밍을 위한 구조적인 부분과 디테일은 무게나 공임이 올라가는 원인이 되었다.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했고 디자인적으로 아름답고 간결하게 그 방식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디자인인지 회의가 들었다. 결국 우리는 좀 더 가볍게 가기로 했다. 과한 기능을 덜어내고 수납에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당시 진행했던 기획, [인터뷰 프로젝트]의 영향도 컸다. 이는 특정 인물을 인터뷰하여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맞춤 가방을 만들어주는 프로젝트로 셰프, 만화가, 가야금 연주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현실적인 문제로 마무리 짓지는 못했지만 내 안에 머물러 있던 디자인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 사용자를 대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내가 만드는 가방을 누군가 사용한다는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몸소 깨우쳤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용자의 진짜 니즈는 수납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브랜드의 디자인 방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나에게 실용성이란 사용자를 세심하게 배려하고 쓰임새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행위이다. 나의 디자인에 타인을 받아들이는 일이기에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
[인터뷰 프로젝트]가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2018년 [스페셜 백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다수가 아니라 소외받기 쉬운 특별한 목적의 가방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선보이는 기획이었다. 첫 번째 가방이 스스로가 사용자였던 ‘반려견 산책 가방’이었다. 일단은 자기 자신이 사용자가 되는 가방을 디자인해보는 것이 실용성의 의미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방법 일지도 모르겠다.
3. 브랜드 아이덴티티
아름답고 편리한 가방이면 충분할까?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 매력적인 서사와 배경이 있다면 그 가방은 대체 불가능한 디자인이 된다. 그게 브랜드 아이덴티티다. 물론 로고만 붙인다고 될 일은 아니다. 브랜딩이란 우리가 가진 철학과 컨셉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들려주는 것이다. 브랜딩에 관한 것은 사실 너무 많은 책과 전문가, 자료들이 있다. 그만큼 브랜딩이라는 것이 산업군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상에서도 널리 적용되고 있고 그 중요성에 대해선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방 디자인의 측면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세상에는 정말 아름답고도 실용적인 소재나 부자재가 많고 디자인을 구현할 다양한 공법들이 있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 브랜드가 쓸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우리 브랜드 컨셉과 어울려야 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바와 맞아떨어져야 채택할 수 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디자인을 할 때 주어지는 수많은 선택지에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브랜딩에서, 그러니까 13년 동안 한 브랜드를 운영해오며 체득해온 여러 가지 중에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브랜드 컨셉과 철학에 대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정제된 언어를 사용해 글로 정리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할 때 컨셉에 대한 이미지나 로고 등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브랜드에 관한 글은 큰 의미 없이 모호하게 적어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작업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브랜드 파운더의 머릿속에만 있던 개념과 이미지를 다수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김으로써 모호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준다. 물론 이미지나 제품으로 표현하는 작업이 소비자가 보기에 더 쉽게 와 닿을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서로 다른 인식을 생성하기도 한다.
브랜드의 컨셉과 철학을 글로 정리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을 정의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그래서 초창기는 물론 운영을 해가면서도 지속적인 수정과 정교한 정리가 필요하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까지, 브랜드의 내용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적어놓는 것.
사실 이 글은 소비자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브랜드 스스로를 지키는 중요한 바이블이 된다. 사람이 변하듯, 브랜드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다. 처음 만든 컨셉은 그동안 만들어낸 각기 다른 이미지들로 혼선이 생기고 유행과 판매 등의 문제로 디자인 역시 초창기와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브랜드를 만든 사람조차 매일 마주하다 보면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외부로 전하고 있는 이미지, 컨셉, 제품, 서비스 등이 제대로 생성되고 있는지 타인이 우리 브랜드를 보듯 낯선 시선이 필요하다. 이때 적절한 환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이전에 찍은 룩북이 아니라 브랜드 컨셉과 철학이 잘 정리되어 있는 ‘글’이다.
브랜드의 변화가 변절이 아닌 성장이 되려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브랜드 매뉴얼이 필수인 셈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항상 동일한 비율로 디자인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한 가지 요소로 정의할 수 없게 섞여 있기도 하며 컬렉션 테마에 따라 혹은 판매처에 따라 조금씩 무게중심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세 가지를 신경 써서 디자인을 하다 보면 나만의 근력이 생길 것이다.
심미성, 실용성, 브랜딩. 이름은 달리 명시하더라도 사실 거의 모든 디자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요소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좀 더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정리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세 가지 요소 하나하나가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해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이후 브랜딩에 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써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
하지만 그동안 이 일을 하면서 몸소 느끼고 체득한 것들 위주로 적기 위해 노력했다.
부디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