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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 Oct 11. 2021

24. 욕구란 무엇인가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개 위기 상황에서나 제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책에서 이 구절을 읽고 나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욕구란 무엇인가?”


  아이들 모두 가야 할 곳으로 보내고 해치워야 할 일들을 후다닥 처리한 후 잠시 여유로운 시간, 아이들 방에 널브러졌다. 손가락만 겨우 움직이며 SNS를 훑어보다가 어느 육아맘의 채우지 못한 욕구를 보았다. 주말이라 가족들 모두 어디론가 나들이를 간 모양이다. 야외정원이 멋지게 펼쳐진 어느 카페에서 엄마와 아이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이런 글이 남겨져 있었다. ‘엄마도 혼자 사진 찍고 싶은데…’ 엄마는 오랜만에 샬랄라 원피스를 빼어 입고 화장까지 곱게 했다. 삼대 구 년 만에 독사진을 남겨보고 싶었겠지만 이를 허락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자식새끼’ 되시겠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놈에 자식새끼들은 엄마의 욕구에는 관심이 없다. 얼마 전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만날 목 늘어진 티에 청바지만 걸치다가 나도 예쁜 사진 한 장 남겨보고 싶어 ‘샬랄라’ 블라우스에 흰 바지를 입고 갔다. 사진은커녕 흰 바지가 때탈까 어디 털썩 주저앉지도 못해 ‘애들 데리고 내가 미쳤지’하는 한탄만 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아이들 사진은 수 십장이지만 그 가운데 내 사진은 한 장도 없더라. 사진 한 장도 내 맘대로 못 찍는 참 팍팍한 삶이어라. 


  내 욕구가 가장 버림받을 때는 아마도 저녁식사시간이지 싶다. 밥을 차려놓고 “밥 먹자”하면 내 새끼, 남에 새끼(시어머니의 새끼)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난다. 어느 새끼 하나 시키지 않으면 수저 하나 놓을 줄을 모른다. 싱크대와 식탁 사이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고 나서야 제일 늦게 내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곧장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가 무섭게 2호가 말한다. “엄마, 물” 하…. 깊은 한숨이 나오지만 미리 물을 챙겨놓지 않은 나를 탓하며 다시 일어선다. 일어섰을 때 한 번에 말하라고 다른 사람은 더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본다. 다들 대꾸가 없다. 물을 가져다주고 이제 밥 좀 먹자 하고 수저를 든다. 또 2호가 말한다. “엄마가 먹여줘” 이제 스스로 숟가락질도 잘하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것인지 꼭 먹여 달라 한다. 눈을 부라리며 엄마도 밥 좀 먹자, 니가 떠먹으라고 복화술로 말한다. 몇 숟갈 먹었다 싶으면 1호의 수다에 시동이 걸린다. 밥 먹다 말고 끝말잇기 하자, 최악의 음식 골라봐, 오늘 유치원에서 어쩌고 저쩌고…. 식사시간에 아이와 대화도 하고 좋지 않냐고 묻지 않길 바란다. 그 사이사이 엉덩이를 들썩이는 2호도 단속해야 하고, 밥 먹는 것을 잊은 1호에게 밥도 먹으면서 얘기하라 다그쳐야 하고, 2호가 때려 엎은 국그릇도 치워야 하고, 남편이 건네는 말에 대꾸도 해야 한다. 숟갈을 놓고 나면 밥을 먹기는 먹었으되 어디 하나 부른 곳 없이 육체적, 심리적 허기가 남는다. 이 허기는 반드시 육퇴 후 야식을 부른다. 어제도 11시에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었고 그제야 마음과 배가 불렀다.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분류했다. 그중 최하 단계가 먹고 자고 싸는 기본적인 욕구라 했다. 육아 살이는 이 기본적인 욕구와 싸워야 하는 순간들을 자주 선물한다. 처음 아기를 낳아 집에 데리고 와서 석 달가량은 잠과의 싸움이다. 물론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아기는 내가 자고 싶은 시간이나 장소, 자세 따위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렇다는 말이다. 100일 무렵부터 통잠을 자는 백일의 기적이 이루어지고 나면 먹는 것과의 싸움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아기는 낮에 자는 시간보다 깨어서 노는 시간이 길어지니 나는 대충 국에 때려 말아 후루룩 들이마시는 것으로 끼니를 때운다. 나는 너를 키우느라 나의 기본적인 욕구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이는 그다음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나를 보챈다. 쉴 틈 없이 눈을 맞추고 안아주고 놀아달라고 한다. 세상은 만 3세까지가 애착형성에 정말 중요하다며 얼른 그 아이의 욕구에 적극 부응하라고 부추기기까지 한다. 돌아버리겠다. 엄마가 돌아버리면 아이는 누가 키우나. 아이들은 엄마가 돌아버리기 직전에 어린이집에를 간다. 그때야 비로소 엄마는 진정한 식사를, 진정한 휴식을 맞이하게 된다. 이 마저도 전업 육아맘이기에 가능하다.


  나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자연스럽게 아이의 다음 단계 욕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밥도 먹고 좀 쉬었으니 출발해 보자는 듯이. 아이가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는지, 뭔가 배우고 익히는 데에 어려움은 없는지, 하고 싶은 것은 없는지, 가고 싶은 데는 없는지 아이의 발전하는 욕구와 요구에 발맞춰 시의적절하고 적당한 피드백을 제공해야 한다. 나의 욕구와 아이의 욕구가 ‘아이는 신나게 노는 게 최고다’라고 합의를 이루었다고 해서 ‘자 이제 나가서 놀아’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처럼 해 떨어질 때까지 골목에서 뛰어놀다가 “ㅇㅇ야!”하고 부르는 소리에 집에 들어가는 그런 때와는 다르다. 캠핑도 가야 하고 여행도 가야 하고 체험학습도 해야 하고 여기저기 전시도 구경해야 하고 끊임없이 놀이를 제공해야 하는 세상이다. 집안에서도 온갖 엄마표 놀이가 넘쳐난다. 그에 부응하지 못하는 엄마는 아이의 발달과정에 따른 욕구를 제대로 충족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엄마가 굳건한 심지를 가지고 주변의 잡음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심지가 어지간히 굵고 야물지 않고서야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심까지 싹 지워내긴 어렵다. 나의 자존감 정도는 잠시 내려놓아도 아이의 자존감은 내려놓을 수 없기에 또다시 나의 욕구는 뒤로 밀리고 만다. 


  이러니 엄마들이 다 큰 자식 앞에 이 말을 내뱉는 것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밤잠 설쳐가며, 똥 싼 바지 손으로 빨아가며, 밥 먹다 숟가락 내려놓고 이에 낀 고기까지 치실로 빼줘 가며 키운다. 아이들한테 너무 매이지 말아야지, 나는 나로서 살아야지 하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 새끼 앞에서 나의 욕구는 오늘도 “기다려!” 상태다. 당연하다 생각하다가도 내가 이러려고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녔나, 애들이 다 크면 나는 뭐하고 살아야 하나 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손에 흘린 아이스크림 자국처럼 끈적이며 나 아직 여기 있다며 부르짖는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나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어 그 최고 단계의 욕구를 물티슈로 닦아내듯 쓱 밀어내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정말 내가 0으로 소실해버릴 것만 같은 불안이 나를 덮친다. 욕구란 충족하기 힘든 상황에서 더 들끓는 거라 생각한다. 0이 되기 전에, 자아실현의 욕구가 망부석이 되어 굳어지기 전에 “기다려!”를 해지하고 “지금이야!”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 작은 불씨를 사그라뜨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뭐라도 해보려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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