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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식사] 믿을 수 있는 건 가족뿐?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2


방영 당시 전국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쌍문동 한 골목에 살던 친구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축은 친구가 아닌 ‘가족’이다. 응답하라 1988에서는 정환, 덕선, 선우, 택, 동룡 가족의 서로 다른 애정을 그리며, 그 형태가 어떠하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개인에게 있어 가장 마지막 순간의 버팀목이 된다는 뭉클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조금 아니꼬운 시선으로 보자면, “가족이라면 이래야지”라는 낭만화된 정상 가족의 모습을 20회의 에피소드에 걸쳐 보여주며 ‘정상가족’의 프레임을 강화한다.


압축적 근대화의 해결사, 가족

더 높이, 더 빨리. 한국의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서사하는 데에는 이 두 개의 부사만으로도 충분하다. 실제로 190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은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뭔가를 높이 쌓아 올릴 때에는 자칫 발을 헛디뎌 추락할 경우에 대비한 안전망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는 그런 안전망이 있는가?


위기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개인을 받쳐줄 사회적 보호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개인이 부여잡을 지푸라기는 뭐가 될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 된다. 해방과 한국전쟁, 급격한 산업화 등으로 사회가 극심하게 변화하는 와중에 사회적 안전망이라곤 찾을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을 보호하는 유일한 안전망은 혈연 및 직계 가족뿐이었다. 지배계급의 강압이 판을 치던 전근대사회에서 가족주의가 팽배했다는 건 많은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 현상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가족주의에서 어느 정도 탈피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은 이와 반대되는 노선을 택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더욱더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근대화 과정 내내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 하에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사람을 먹이고, 키우고, 보호하고, 가르치고, 치료해주고, 부축해주는 그 모든 일들이 전부 가족의 책임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친밀한 사적 생활영역이라기보다 거의 공적 영역을 뒷받침하는 성격을 갖게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겼고, 그 결과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족 총력전'이 불가피해졌다.


개인이 아니라 가족의 경쟁

몇 년 전,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재미있게 봤다. 분명 재밌는데, 보면서 숨이 막혔다. 그 이유는 나 역시도 ‘예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 부모님의 총력전에 수혜를 받아 명문대를 가기 위해 애를 쓰고, 이름 있는 대학을 졸업하는 것만이 부모님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90년대생이라면 이러한 보은 주의에서 자유로운 이는 얼마 없을 것이다.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드라마에서 명확히 보여주는 '부모의 희생과 헌신-자녀의 보답'의 관계에 내 발이 저린 느낌이었다.


시대가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부모의 헌신'과 '자식의 보답' 구조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든다. 헌신과 보답의 도덕적 의무로 서로에게 짐을 지우는 이 가족주의의 구조 안에서 행복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씁쓸한 현실이지만 이제 우리 사회가 부모의 신분이 자녀에게 세습되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데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금수저, 흙수저와 같은 '수저 계급론'은 그저 비아냥대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점점 강력해지는 신분 세습을 반영한 자조적 표현이다. 한국교육고용패널 데이터를 10년간 추적한 결과, 개인의 노력과 무관하게 부모 배경의 변수가 개인의 수능성적 불균등을 9.7% 정도, 임금 불균등을 3~3.5% 정도 설명해준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잠을 줄이는 만큼 아이들의 성적이 오를 거라는 환상을 강요하지만, 사실 개인이 얼마나 노력하든 상관없이 집이 부유하는 아이들은 수능 성적에서 10%가량을 이미 받고 시작하는 셈이다. 이처럼 부모세대의 교육과 소득이 자녀의 교육 수준에 계승되고 임금 격차를 만들어낸다면 사회계층의 세습은 더 심해질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져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은 곧 계층의 하락을 의미한다. 적어도 지금 Y세대에게는 그렇다.

상당수의 청년들은 독립을 유보한다. 부모의 과도한 기획과 권력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곧 계층의 하락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독립을 포기하고 끊임없이 의존하기를 선택한다. 취업을 했더라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는 '캥거루족'은 중산층 가족 내에서 부모 자녀 관계의 도구적 의존성이 강화된 견고한 가족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태와 무관하게, 가족은 중요하다. 지치고 힘들 때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친밀감과 보호의 근거지로서 가족은 여전히 필요하다. '헌신적인 부모’와 '보답하는 자녀'의 관계로만 가족을 정의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서로에게 짐을 지우는 가족주의 구조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가족 모든 구성원에게 친밀한 삶의 기지가 되는 가족을 만드는 데 '공(公)'을 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족의 '공·사'비율에서 '공'을 늘리기 위해 공공이 개입하는 것은 가족을 해체하자는 것이 아닌 가족의 짐을 사회가 덜어주자는 의미다. 가족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모두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 가족에게 부과된 의미와 기능을 축소하자는 것이다. 모두가 가족 밖의 어떤 목표를 향해 죽자고 달려가며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율성 존중이 가능하겠는가. 가족의 짐을 사회로 옮겨오고, 어떤 가족에 속하든 다양한 개인들의 공동체인 가족이 형태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의 짐을 사회로

비혼과 저출산 추세가 보여주듯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더 이상 사회적 자원이 아니라 '개인적 위험'처럼 되어간다. 주거 문제에서부터 양육의 엄청난 부담, 교육을 위해 가족이 총력 경쟁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이 아예 가족 구성을 회피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결혼과 출산의 기피는 어쩌면 위험에 직면한 개인의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족에게 지워진 짐을 어떻게 사회로 옮겨야 할까? 가족이 매고 있는 가장 큰 짐 중 하나인 돌봄을 예로 들어보자. 정치학자 조안 트론토 Joan Tronto가 말한 것처럼‘돌봄’은 공공적 가치를 지닌 공동재다. 특정한 성(性)이나 계급에게 일임해서 해치울 일이 아니라 민주적 정부와 시민 모두가 책임져야 하는 과제다. ‘양육에 대한 복지’는 더 이상 '여성정책'이라고 불릴 게 아니라 남녀·결혼 여부·가족 형태를 불문하고 아이를 키우는 모든 사람이 지원을 받는 정책이 되어야 한다.


돌봄의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지 않고 사회로 돌려오는 정책이 필요하다. 단순히 아동수당 지급 예산을 늘리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책임의 무게를 공평하게 지기 위해서는 남성 육아휴직 의무 할당, 고용형태 간격 차 해소와 성 평등한 기업문화를 아우르는 노동정책 개선도 필요하다. 개천에서 용 나기 위해 개인에게 모든 고난을 감내하라는 희망 고문은 더 이상 이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개천도 살 만한 곳이어야 하고, 미꾸라지가 용이 될 기회가 차단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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