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데미안』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7쪽)
소설 『데미안』을 여는 첫 문장이다. 헤르만 헤세는 1919년, 본명이 아닌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출간했다. 헤세가 가명으로 출간한 이유는 비밀로 남아있지만, 어쩌면 그러한 결정이 헤세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의 명성에 기댄 출간이 아니라 이름 없는 작가의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가 더욱 실감 날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에밀 싱클레어의 이야기는 당시 많은 주목을 받았고 『데미안』의 매혹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사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려울까? 만약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금기시된 것이라면, 그것에 따라 살 수 있을까? 헤세는 소년 에밀 싱클레어를 통해 보여준다. 내 안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삶이 어떠한지를.
한쪽에는 선량하고 허용된 세계가 있다면 다른 쪽에는 어둡고 금지된 세계가 있다. ‘밝은 세계’에 속하는 싱클레어는 금지된 세계에 대한 은밀한 동경이 있다. ‘심지어 이따금은 금지된 세계에 사는 것이 가장 좋기도 했다’(12쪽) 싱클레어는 돈을 요구하는 프란츠 크로머를 두려워하면서도 거짓 이야기를 꾸며낼 만큼 프란츠로 대변되는 어두운 세계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프란츠의 요구가 커질수록, 싱클레어는 두려움은 커지고 나약해질 뿐이다.
그 무렵 학교에 데미안이 나타난다. 데미안은 이미 그만의 개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였다. ‘그는 모든 점에서 다른 애들과는 달랐다. 철저히 독특한 그만의 개성이 드러났고, 그 때문에 눈에 띄었다.’(35쪽) 데미안은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에 대한 해석을 전복시킨다. 카인을 하나님에게 받은 ‘표’로 인해 보통사람보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죽임을 당한 아벨은 겁쟁이라고 '해석'한다. 데미안의 해석은 아벨의 세계, 밝고 깨끗한 세계에 속해 있던 온실 속의 화초 싱클레어를 뒤흔든다. 카인을 두둔하다니. 데미안은 ‘카인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일까?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놀라우면서도 두려운 존재다.
무엇보다 데미안에게는 생각 읽기,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직관적인 눈이 있다. 누군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면?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지닌 두려움을 간파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지닌 비밀, 크로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싱클레어를 두려움으로부터 구해준다. 싱클레어는 알게 된다. 두려움을 공유할 때 좀 더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두려움을 쫓아준 구원자였다.
내가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는 존재. 그 세계는 낯설고 두렵지만 나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그곳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 이끌리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존재가 부담스럽다. 싱클레어의 방황이 말해주듯,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은 매우 험난하고 힘겨우니까. 그러므로 쉽게 해결하고자 한다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무시하면 된다. 마치 그곳에 없는 양 우러나오는 것을 회피하면 된다. 그렇다면 애써 알을 깨고 나오는 투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은 힘겨우므로 나를 편안하게 하는 익숙한 세계에 머무르면 그만이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알게 된다. 자신의 무의식이 데미안에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일종의 신의 모습 또는 거룩한 가면처럼 보였다. 절반은 남자, 절반은 여자, 나이를 넘어선, 의지력이 강하면서도 꿈결 같고, 뻣뻣하면서도 은밀히 생동하는 모습이었다.’ (99쪽) 싱클레어가 그린 그림은 데미안의 형상이었다. 극과 극이 공존하는 이미지는 반복된다. 선과 악의 통합. 신인 동시에 악마. 밝고 어두운 세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가까이 있다는 자각. 한 존재는 선한 동시에 악하다는 이중성. 데미안의 주문 ‘네 안의 두려움을 없애라’는 그러한 이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은 크로머의 얼굴로, 때로는 다른 얼굴로 찾아올 것이다. 그것은 종말의 시작에서 전쟁이라는 얼굴로 온다. 데미안은 전쟁을 회피하지 않는다. 이제 싱클레어는 데미안 없이도 스스로 맞서는 존재가 된다.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고 두려움을 지배하는 자로.
싱클레어는 자신 안에서 데미안을 발견한다. 그것은 싱클레어가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피하지 않고 계속 따라 간 결과 였다. 그가 스스로 발휘한 용기로. ‘자기 자신이 되어라’는 말은 싱클레어의 나이 청년기를 지나도 여전히 유효하다. 설령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찾았다 하더라도 그 길을 계속 가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속한 익숙한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맞닥뜨릴 때 그것이 지닌 근본적 두려움은 여러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낯선 세계에 용기 있게 발을 딛고 두려움에 직면할 수 있을 때, 성장의 가능성이 열린다.
방황은 낭비라고 생각하고 정해 놓은 길, 다수의 길에 속하려고 고군분투한다.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게 답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을 대면하기보다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가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한 길이니까.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어떤 이유로 금지되었든, 부끄러운 것이든, 차마 말할 수 없이 두려운 것이든 그것에 귀 기울이며 피하지 말고 직면한다면. 치열하게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고민한다면 삶의 두께가 달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