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매해 연말연시에는 영화에 관한 두 가지 목록을 정리한다. 연말에는 나만의 영화 리스트(올해의 BEST라 부르기에는 모수가 부족하고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정도)를 포스팅하고, 연초에는 신뢰하는 미디어와 평론가들의 리스트를 체크하여 놓친 영화들의 제목을 메모장에 적어둔다. 2020년 결산은 예년과 다른 느낌이다. 코로나로 극장 개봉작의 편수가 줄고 OTT가 성장한 영향일 텐데, 고비용 대작보다 작은 영화들이 많아졌고 취향에 따라 선택이 다양해졌다. 좋은 부작용이라 불러도 될까. 여하튼, 그럼에도 모두가 인정하는 공통분모 같은 작품들이 있으니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그중 한편이다.
극장에서 보고 들었으면 좋았을 영화. 페미니즘과 퀴어의 메시지를 풀어내는 스토리와 18세기 프랑스의 외딴섬에 펼친 미장센의 구도가 좋고 무엇보다 시네마틱하다. 영화의 본질에 충실하고 그 매력이 타오르니 내내 '스크린 앞에 있었으면 좋았을 걸, 좋았을 걸'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와 많이 겹치기도 했다. 초상화 작가인 주인공의 초상화 (다시) 그리기가 메인 스토리인 것도 그렇고. 기사단장이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를 모티브로 했다면, 여인의 초상이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를 인용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돌아봄과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요"의 테마가 각기 다른 해석의 솔로와 애정 어린 합주를 이어가는 플롯은 재즈적이기도 하다.
회화적인 작품이지만 음악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마리안느의 경쾌한 피아노 연주로 극의 중간이며 사랑의 한 복판에서 한 번,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로 이별 후 엔딩에 또 한 번 연주되는 비발디 《사계》 中 '여름'이 가장 중요한 테마 음악이고, 여인들의 합창신은 시네마틱을 넘어 마술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