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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Sep 28. 2021

슬픔의 모양은 모두 다르다.

첫 번째 임종 면회

오늘 아침, 아빠의 임종 면회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백신 2차 접종의 후유증으로 밤새 잠을 설친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빠가 입원한 건 한 달도 더 전의 일이다. 움직이는 게 힘들어지셨다는 소식에 고향에 내려가서 아빠를 싣고 올라왔다. 그리고 그 이후로 만날 수 없었다. 코로나 시대 면회 금지 정책 때문이다.


엄마를 보러 병원은 거의 매일같이 방문했다. 엄마는 늘 괜찮다고 말했다. 간병인의 교체도 외출도 되지 않는 코로나 시대의 병원에 엄마도 함께 갇혔다. 처음엔 병원 지하에서 엄마와 밥 한 끼 정도는 같이 먹는 정도는 가능했다. 아빠 상태가 악화되고, 병원 내 코로나 전염 사례가 발생하면서 그것도 어려워졌다. 엄마는 잠시도 병실을 비울 수 없다고 했다. 왕복 두 시간 가까이 걸려서 찾아간 병원에서 빨래와 먹을거리를 주고받고 바로 헤어져야 했다. 엄마는 사정이 이러저러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아마 스스로에게 하는 말씀이셨을 것이다. 가족 카톡방에 읽지 않음 1 표시가 계속 남아있다.


면화를 오라고 전화를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고 울먹임이 같이 묻어났다.

"차 몰고 오지 마라. 택시 타고 와라."

 왜 택시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택시를 불렀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오늘따라 택시 기사가 아파트 입구를 찾지 못해 뱅글 돌다가 콜을 좀 취소해달라고 전화가 왔다. 짜증 낼 힘도 없었다. 터벅터벅 큰길로 걸어 나가는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멍하고, 모든 것이 조금 느리게 느껴졌다. 다행히 택시가 잡혔다. 택시기사는 내 심각한 표정을 보고 목적지를 듣더니 별다른 말없이 총알처럼 달렸다. 너무하다 싶게 끼어들고 차선을 바꿨다. 그래도 길이 꽤 막히는 날이었고, 어지러웠다. 이런 상태로 운전하면 사고가 나는구나 싶었다. 운전하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고 느꼈다.


"무슨 일로 오셨죠?"

'면회 금지'가 커다랗게 쓰인 단상 옆에 선 보안요원이 물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몇 초간 얼굴을 구기며 흔들렸다. 임종 면회인데요, 까지 말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아이 같은 울먹임이 같이 터졌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추상적인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현상이라는 걸 다시 느꼈다. 지난번 사진관에도 같은 경험을 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영정사진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아서 얼굴이 울그락붉그락해졌다. 겨우 입을 떼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네에. 언제까지 필요하시죠? 급하신 건가요?"

그 한마디에 그 자리에서 서서 한참을 눈물을 뚝뚝 흘렸던 것 같다. 그때만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던 순간도 자주 오지 않을 것이다. 사진사는 그저 월요일에 1차 수정 사진을 보내줘도 될지 물어보려던 것뿐이었다. 마치 언제 돌아가시냐고 묻는 야속한 질문 같이 들렸지만.


면회 종류 칸에 또박또박 '임종 면회'를 적고, 연두색 면회증을 받아가자 초연한 표정의 직원분이 나를 접수 데스크로 안내했다. 그리고 18층에 있는 병실까지 하얀 셔츠를 입은 보안요원이 따라왔다. 아빠는 병실에 없었다. 당황한 보안요원이 여기저기 아빠의 행방을 묻고 다니더니 처치실로 나를 안내했다. 아빠는 처치실에 혼자 누워있었다. 마치 SF의 한 장면처럼, 주렁주렁 많은 줄과 기계가 보였다. 숨소리가 크고 거칠었다. 마치 러닝머신 위에서 뛰는 사람처럼 거친 숨소리였다. 산소포화도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면회 시간은 10분이라고 했다. 갑자기 자식들이 면회 와서 울고 하면 환자가 놀랄 수 있으니 울지 말라고 하셨다. 엄마가 흔들어서 말을 걸며 아빠를 깨웠다. 

"여보, 특별히 면회가 되는 날이라고 해서 애들이 왔어."

잠시 가늘게 눈을 뜨고 아들과 딸을 바라봤다. 동요 없는 눈이었다.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빠는 다시 침착하게 눈을 감았다. 엄마가 다시 흔들어 깨우더니 말했다.

"당신 치료 잘 받고 있어. 빨리 치료받고 집에 돌아가서 집 한 바퀴 돌자. 소원이야 응?"

그 말을 하다가 울먹이는 엄마를 쳐다보면서 아빠는 아주 눈을 크게, 강하게 떴다. 그동안 엄마는 단 한순간도 아빠 앞에서 포기하거나 비관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 그랬다. 그리고 아빠 몰래는 울어도 아빠 앞에서는 잘 울지 않으셨다. 엄마를 보는 아빠의 크게 뜬 눈에서 미안함과, 사랑과, 애틋함 같은 것들이 쏟아졌다. 잊을 수 없는 눈이었다.


그러게 자식 온 게 뭐가 대수겠나, 사십몇 년을 한 이불 덮고  애증의 세월을 쌓아온 배우자가 옆에서 절절하게 우는데. 아빠는 진작에 연명치료 거부 신청을 해두었다. 이번에 치료를 받는 것도 엄마가 너무 원해서라고, 이제 쉬고 싶기도 하다는 얘기도 했었다. 엄마는 아빠를 계속 살렸고 아빠도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 여러 번 울었는데, 이상하게 아빠 앞에선 눈물이 나지 않는다. 손을 잡고, 식은땀을 닦아드렸다. 처음에 얘기한 면회시간 10분이 지났지만 간호사는 모른 척해줬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제 가셔야 한다고 조용하게 얘기했을 때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얘기했다. 엄마에게 내일 또 올게, 하고 손 흔들고 나왔다.


로비에 내려가서 쉴 새 없이 빽빽 우는 돌쟁이 조카를 안았다. 병들고 아픈 사람들이 가득 찬 건물 1층, 갓 태어나서 자기만 생각하며 우렁차게 우는 아기라니. 사람들이 왜 죽음이 두려워서 자손을 남기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빨간 얼굴의 아기 조카는 울고, 철없는 유치원생 조카는 내 손을 잡고 로비를 뱅글뱅글 돌았다. 어린이들은 아프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세계의 입구에 서서 나 여기 있소, 하고 소리소리 지른다. 생명과 생명과, 생명의 각축장 같은 로비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까 잠깐 녹음했던 아빠의 숨소리를 들었다. 생명의 소리 그리고 또 다른 소리로 들렸다. 이 시간이 오는 것을 수년 동안 두려워했는데, 막상 다가오니 대부분의 감정은 어지러움 정도로 표현되었다. 이 묵직한 돌 같은 슬픔은 공기처럼 떠돌아다니다가 누군가의 질문 한마디에 터져오를 것이다. 가족들 각자가 느끼는 슬픔의 방식과 모양도 다를 것 같다. 평생 끌어안을 상실이 될 것이라는 점은 모두 같겠지.


아빠가 1인실로 옮겼고, 호스피스가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고 문자 초안을 써서 엄마에게 보냈다. 그리고 내일 치의 슬픔을 위해서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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