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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의 너여도 괜찮다고

월간에세이 11월호

by 이일일



‘그대로의 너여도 괜찮다고’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 참 행운이자, 온전한 감사함이다.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사람 중 한 명인 너는 나에게 꼭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알리고 싶은 존재였다.

어김없이 만나면 친구끼리 부끄러운 안부를 20년이 지난 지금도 어색하게 먼저 던지는 너를 보며, 나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까 급한 마음을 달랬다. 가정을 꾸린지 얼마 되지 않은 너에게 결혼에 대한 것은 일절 묻지 않았다.

왜 그랬는고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너의 표정이 다 말해주었더라. 충분히 잘 지내고 있다고. 괜찮다고.

늘 내 이야기를 먼저 다 들어주고 나서야 꺼내는 너의 고민은 나에게도 늘 반성할 수 있는 기회와 겸손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어주는 소중한 것들이었다.


“내가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아. 실수도 자주 하고,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고 다니는지 모르겠어. 내가 원래 그렇잖아. 덜렁대고 놓치고 실수하고.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다시 나오고 있어. 그래도 긴장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나오고 있어서 요즘 내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고민이 많아.”


정말 진심으로 고민이라는 듯 심각하게 이야기를 꺼낸 너의 표정과 모습에서 나는 묘한 편안함을 보았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다시 너의 말과 너의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진짜 맞기는 하지만 아니구나.

정말 너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은 맞다 느꼈다. 너는 원래 그랬다. 나사가 빠졌다고 표현했지만, 너에게는 늘 유연함이 있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은 여유와 편함이었으리라. 네가 동경하는, 완벽한 계획으로 철두철미한 모습을 가지는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따라가기 위해 너는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안다. 이렇게 너에게 말하면, 아니라며 그렇게 노력하지 않았다고 손사레를 칠 너를 예상하며, 나는 이것을 동경이라고 표현하는 데에 너에게 조금은 미안함을 가졌다.


“네가 많이 편안해졌나보다. 그런 모습을 동경하는 널 알지만, 굳이 이제, 계속 그것을 향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너로도 충분히 편안하다면 그게 얼마나 좋아.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동경하는 모습과 스스로를 동일시해. 동경하는 모습과 본인은 엄연히 다른데 나에게서 동경하는 모습에 따른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렇게 자괴감을 느끼고 우울감을 느끼는거야. 나올리가 없는데 말이지.”


들어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었지만, 실수를 거듭했던 이야기들을 하며 심각한 듯 멋쩍게 웃는 너를 보며 진짜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괜찮구나, 진정 너여도 괜찮겠구나. 그런 너의 본연의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너에게 충분하겠구나. 얼마나 좋은 삶인가.

아마 스트레스를 받거나 못 견디게 동경하고 싶은 날엔, 그런 날엔 어련히 알아서 네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지. 하기 싫어도 어떻게든 해낼 것을 알기에.

그런 너를 알기에, 이제는 편안함을 보이는 네가 참 나는 다행이다. 그렇게도 너는 너의 생긴 모양새에서 원치 않는 것은 덜어내고자 애를 써왔다는 것을 안다. 너는 내가 너보다 너를 잘 안다고 했다. 너는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나는 하나 하나 내 눈에 들어오고 느껴졌으니. 기억한다.

그리 안쓰러웠던 만큼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겐 불가능했다. 그저 이렇게 노력하는 너에게 네가 동경의 모습이 주어지기를, 노력을 더 하지 않아도 조금은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제 “내가 나사가 빠졌나보다”하고 웃는 네가 나는 편하다. 그런 너의 웃음이 오랜만에 너와의 대화에 찾아온 너만의 평화 같았다.


이제는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도 되지 않겠냐며 나는 자신있게 너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그 동안 너무 수고했노라고, 이제 너도, 너의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졌나보다고 내가 다 뿌듯해 그렇게 너에게 이야기했더랬다.

이제야 너의 본연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보고 너 스스로 사랑할 준비가 되었구나 싶었다. 그랬기에 나도 오늘 만큼은 너에게 응원을 멈추고, 너의 동경을 향한 나의 열정도 멈추고 그냥 그런 너여도 괜찮다 했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가정의 꾸리는 날이 올까 했던 17년 전의 그날의 공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이를 먹는 것을 점점 더 오래도록 인생에서 해야만 하는 우리는 아직 젊지만 그 때의 우리보다 문득 많이 자랐구나 싶다. 나이를 먹어도, 많은 것이 변해도 늘 너를 통해 내가 배우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온전한 너로 편안해진 너를 보며,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밟고 있는 나에게, 덕분에 나도 온전한 나로 온전한 너를 응원하며 괜찮다 했던 오늘, 날이 좋았다.




* 월간에세이 25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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