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된 엄마가 즐겨보시는 TV 여행 프로그램 중에 <걸어서 세계 속으로>가 있다. 엄마가 틀어놓으면 나도 옆에서 따라 시청을 하기도 했는데 2022년에 방영된 뉴질랜드 편의 제목이 ‘천 개의 얼굴, 뉴질랜드'였다. 맞아. 그렇지. 뉴질랜드는 총천연색의 묘한 매력을 간직한 나라인 점에서 100% 공감 가는 제목이었다. 지금까지 뉴질랜드에 지내면서 천 개 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십 개의 얼굴은 발견한 것 같다. 그중에서 혹스베이의 '테마타 픽'은 내가 발견한 뉴질랜드의 얼굴 중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얼굴이었다. 만약 누군가 혹스베이를 여행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테마타 픽에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사실 처음부터 혹스베이를 여행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와 여행 루트를 논의하고 있던 중 마침 전 뉴질랜드 총리였던 '저신다 아던'이 혹스베이의 어느 와이너리에서 파트너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BBC 뉴스 기사를 읽게 됐다. “혹스베이? 여기 어때?” 현지 친구에게 제안했고, 우리는 혹스베이의 색다른 자연을 즐기기 위해 북섬 여행 행선지에 추가했다. 물론 처음부터 테마타 픽에 가려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네이피어의 아르데코와 미션 이스테이트 와이너리를 방문한 뒤 혹스베이만의 독특한 매력에 흠뻑 빠져들어 흥분된 상태였다. 이번에는 자연을 만끽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따라 다음 행선지를 물색하던 중 우리의 안테나에 잡힌 곳이 바로 '테마타 픽'이었다.
뉴질랜드 관광청에 따르면 테마타 픽에 얽힌 슬픈 마오리 전설이 있다. 혹스베이의 어느 평원에 살던 A 마오리 부족은 거인 해안 부족 B가 언제든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지냈다. 어느 날 부족 모임에서 B 마우리 부족 대표 테마타가 A 부족 추장 딸을 사랑하게 되면 마을에 평화가 온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 제안이 성공해 테마타는 추장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B 부족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A 마을 사람들은 그의 사랑을 증명하라면서 테마타에게 수행하기 불가능한 어려운 미션을 준다. 마지막 미션이 바로 해안과 평원 사이에 있는 언덕을 입으로 물어뜯어 사람들이 손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헐어내는 임무였다. 테마타는 이 미션을 수행하다 결국 지쳐 죽고 만다. 그 미완성 미션이 바로 빅갭, 또는 마오리어로 파리카랑아랑아이고 그 옆에 누운 테마타의 시신이 테마타 픽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테마타 픽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걸어서, 자전거를 타고 또는 차를 타고 갈 수 있다. 나와 친구는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우리는 간단한 저녁거리를 싸들고 테마타 픽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뺑뺑 돌며 꼬불꼬불 좁은 길을 운전해서 올라가다 보면 이런 곳에도 주차장이 있을까 싶은 곳에 주차장이 보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차들이 여러 대가 서 있었다. 주차장에서 조금 더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칠게 헤쳐 모여있는 구름들 사이로 저녁 햇살이 쫙 비치는 이 장엄하고도 신비스러운 파노라마 장관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화산이 만들어낸 올록볼록한 초록빛 봉우리들 위로 금방이라도 신이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은 그런 광경이었다. 조용히 무릎을 꿇고 겸손한 자세로 그분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앞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겠습니다, "라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여기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살아있음에 그저 감사한, 정화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와 나는 말없이 언덕배기에 앉아 이 어메이징 한 풍경을 눈에 꼭꼭 담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벅차도록 아름답고 위대한 풍경을 담기에 핸드폰 카메라 성능이 한없이 부족함을 느끼면서.
바람이 불면서 조금 쌀쌀해졌다. 우리는 가져온 샐러드와 스모크 연어, 크래커를 펼쳐두고 조용히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신의 제단 앞에서 절로 경건해졌다. 나와의 대화, 자연과의 대화 시간을 갖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온이 조금씩 떨어졌다. 우리는 "이제 그만 갈까?" 눈빛을 교환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의 제단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꼼꼼하게 자리를 살폈다. 다시 좁은 길을 뺑뺑 돌아내려왔다. 친구와 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음악도 틀지 않았다. 벅찬 감동을 나누지도 않았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단어 특히 영어로는 지금의 이 느낌과 감동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테마타 픽은 그런 곳이었다. 비록 거인 테마타의 시신의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절로 자아성찰이 되는 곳. 인생에서 한 번쯤은 가봐야 할 곳. 이 글을 쓰면서 테마타 픽 사진을 들여다보니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테마타 픽이 내게 준 커다란 질문을 곱씹으며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