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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킨스데이 Apr 23. 2024

경력 제로 베이비시터의 하루

비자발적으로 구충제를 복용한 사연


  '워킹맘'을 코칭한 적이 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고군분투하는데 생각보다 직장에서 인정받기 힘들고 그렇다고 가족의 응원과 격려도 받지 못하는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상황이셨다. 그래서 속상해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그분의 말에 경청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나에게 워킹맘은 '원더우먼'과 동급이다. 그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라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동생도 워킹맘이다. 전문직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일에 어찌나 열정이 대단한지 가끔 급하게 초등학생 남자아이 둘을 봐달라고 S.O.S를 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를 방패 삼아 베이비시팅을 회피하는 편이다. 마음으로는 전적으로 돕고 싶지만 에너지 넘치는 남자 애 둘과 씨름하기라도 할라치면 금방 체력이 방전이 된다.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어주거나 레고나 팽이 게임을 같이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그 이상은 부담스럽다. 어쩌면 '아이'라는 존재를 향한 내 애정과 관심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일 수 있다. 그냥 무관심한 편이라고나 할까?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이 연극의 주인공이라면 나는 그냥 뒤에서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 1에 불과하다.         


벨라와 함께 완성한 레고로 완성한 배 © 2024 킨스데이


  그런 나에게 '베이비시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오클랜드의 친구 집에 2주간 머물게 됐는데 워킹맘과 워킹대디인 친구 부부가 부부동반으로 회사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스케줄이 생겼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와이프의 회사에서 업계 사람들과 네트워킹 파티를 하는데 바에서 제공하는 주류가 모두 무료인 그런 행사였다. 와이프는 업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래서 최신 정보와 이직의 가능성도 탐색해 볼 수 있는 기회였고, 술을 사랑하는 남편으로서는 1년에 한 번 샴페인을 맘껏 마실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물론 강요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 사정으로 2주간 게스트로서 무전취식하며 신세를 지고 있던 나로서는 부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물론 내가 거절하면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겠다고 했지만 굳이 내가 있는데 돈을 써서 외부인을 집에 들인다는 게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아이의 정서적인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력은 없지만 그런 베이비시터도 괜찮다면 제가 할게요, "라고 살짝 자신 없는 말투로 얘기했다. 그랬더니 와이프가 "아유, 크게 걱정하실 것 없어요. 벨라(가명)가 잘 따를 거예요. 저녁때만 조금 놀아주시다가 일찍 재우시면 돼요, " 라며 내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응답했다.


저녁 식사로 짜장면을 먹고 있는 벨라  © 2024 킨스데이


  벨라는 6살짜리 초등학생 아이다. 2살 때인가 아주 어릴 때도 한 번 본 적이 있고 이번에 함께 지내면서 가까워졌다. 관심받고 싶어 하고 관심받으면 좋아라 하는 딱 그럴 나이다. 벨라는 유독 각종 동식물과 테일러 스위프트를 사랑하는 에너지 넘치는 아이였다. 등하교를 돕기 위해 워킹맘이나 워킹대디를 따라 학교에 가면 달려와 반겨주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같이 놀자고도 했다. 그래서 나도 평소에 벨라와 놀아주며 베이비시팅에 대한 자신감이 키워나가고 있었다.


  베이비시팅 예정일의 바로 전 주말인 토요일, 워킹맘은 벨라를 데리고 키즈 카페에 데리고 갔다. 또래가 있는 엄마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벨라는 한바탕 패션쇼를 하고 나서 오전 10시쯤 엄마와 외출했다. 모녀는 오후 4시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라면 나랑 더 놀자고 방방 뛸 텐데 벨라는 아무 말 없이 거실 소파에 푹 쓰러졌다. 대충 저녁을 먹고 씻은 다음 일찍 잠이 들었다. "4시간 넘도록 키즈 카페에서 정말 가열차게 뛰어놀았어요, "라는 말을 들으니 에너지가 방전될 때까지 잘 놀았구나 싶었다. 친구 부부와 함께 넷플릭스를 시청하며 쉬다가 '굿 나이트'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벨라의 바로 옆방이었다. 쌕쌕 작게 코를 골며 자는 소리가 들렸다. "무지 피곤했었나 보네, " 나도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우아앙, 아파, 아파, 아아앙!" 갑자기 벨라가 울부짖는 소리가 옆방에서 크게 들렸다. 잠을 깨서 핸드폰을 확인하니 한 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창 밖은 아직도 깜깜했다. 벨라의 엄마와 아빠가 다급히 달려와 벨라를 달래기 시작했다. 엄마는 어디가 아픈지 벨라의 상태를 살폈고 아빠는 벨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카모마일 차를 만들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나도 방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내가 도와줄게 뭐가 없는지 살폈다. 그날 이후로 벨라는 일요일과 월요일 밤에도 동일한 증상을 보이며 어른들을 깨웠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표정으로 시리얼을 먹고 학교에 갔다. 벨라도 잠을 설쳐서 그런지 살짝 다크 서클이 내려앉긴 했지만. 워킹맘과 워킹대디, 그리고 내가 문제였다. 일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다들 피곤함에 쪄들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월요일에 전화를 걸어 최대한 빨리 예약한 것이 화요일 오후였다. 뉴질랜드 병원 시스템이 이렀다. 우리나라와 달리 바로바로 동네 병원에 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애아빠와 나는 모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엄마의 말로는 의사도 벨라의 상태를 살피더니 "특별한 증상이 없네요, "라며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단다. 그래서 무슨 약이라도 처방해 달라고 말했고 '구충제'를 받아왔다는 것이었다. 게스트를 포함한 모든 어른들도 다 복용해야 한다기에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돌아가며 구충제 한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정확히 10일 후에 한 번 더 복용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벨라 가족과 완성한 대형 퍼즐 © 2024 킨스데이


   그날 밤, 벨라는 다행히 깨지 않았다. 우리도 오랜만에 숙면을 했다. 수요일밤과 목요일밤도 평화로웠다. 벨라가 아프지 않다면 부부는 예정대로 금요일 저녁 네트워킹 파티에 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내가 베이비시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드디어 금요일. 재택근무를 하는 아빠가 벨라를 학교에서 픽업해서 집으로 데려왔다. 벨라는 건강해 보였다. 벨라와 관련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해주고 아빠는 외출했다. 워킹맘은 직장에서 바로 파티 장소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이제 남은 건 벨라와 나. 먼저 레고로 배를 함께 만들었다. 완성이 되자 벨라는 자기 방으로 나를 데려가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패션쇼를 펼쳤다. 인어공주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해서 사진을 찍어주고 부모와의 카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책을 함께 읽다가 저녁 식사로 짜장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벨라는 김치를 좋아해서 작게 잘라 접시에 담아주었다. 열심히 먹는 모습도 촬영을 해서 카톡에 공유했다. 간식을 먹고 양치를 한 뒤에 디즈니 플러스에서 만화영화를 보기로 했다. 베이비시터와 노는 날에는 부모도 좀 더 너그러워지기 때문에 잠드는 시간도 우리가 정하면 됐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불을 나눠 덮고는 "박물관이 살아있다"를 시청했다. 벨라가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잘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다. 벨라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설거지할 것과 식기세척기에 넣어둘 것을 분리하고 거실을 정리했다. 벨라의 방에 가서 조명과 선풍기, 음악 세팅을 해 잘 준비를 도와준 다음 벨라가 고른 책을 두 권 읽어주었다. "이제 잘게요." 베이비시팅 업무가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벨라가 잠들었다는 메시지를 단체방에 남기고 나도 내 방으로 퇴근했다. 


  하루가 길게 느껴지기 했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벨라가 나를 잘 따라주었다. 첫 번째 공식적인 베이비시팅이 성공적으로 마쳤다. 부부도 벨라가 태어난 이후로 이렇게 밤늦게까지 함께 외출한 적은 처음이라며 고마워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었다. 물론 금요일 전에 부모로부터 말을 잘 들으면 '스퀴쉬멜로우' 선물을 주겠다는 약속이 있었고 그 평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공식 선언해 준 영향도 있었다. 그리고 벨라와 이미 라포(Rapport)가 잘 형성됐었다. 그래서 나는 금요일에 베이비시팅을 시작하기 전 벨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벨라야, 나는 네가 이번 기회에 너의 최애 인형인 스퀴쉬멜로우를 꼭 받았으면 좋겠어. 우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이번 경험을 계기로 베이비시팅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사라졌다. 길에서도 뉴질랜드 아이들을 보면 인형같이 귀엽다. 하지만 누가 아이를 봐달라고 하면 난 또다시 주저할 것 같다. 대학생과 어른들을 대상으로 '코칭'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아이들은 내 영역 밖이다. 어른들의 영향력을 알기에 혹시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봐 조심스럽기도 하고. 아이들 눈에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른 김장하'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어야지. 생각난 김에 두 조카들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적어도 이모 역할부터 충실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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