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당후곰"의 자세를 배웁니다.
"강사님 8월 1일 시간 되세요?"
얼마 전, 워크숍을 소개해주는 회사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8월 1일 오후 일정을 체크하는문자였다. 요즘 워크숍이 뜸해 연락이 반가웠지만 스케쥴을 보니 망설여졌다. 7월 30일부터 8월 2일까지의 여름휴가 일정과 딱 겹쳤던 것.
우선 아내에게 해당 내용을 알리고 물어봤다. 나의 어리석은 질문에 아내의 현명한 대답을 기대했다.
"우선 된다고 해"
아내의 대답은 간결했고, 진취적(?) 이었다. 사실 업체에서는 시간을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 아직 확정이 된 상황도 아니었다. 게다가 워크숍을 통해 밥벌이를 하는 처지라 들어온 제안을 자르기도 애매했다. 아직 내가 거절할 만큼 많은 워크숍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아내는 될지도 안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우선 된다고 하라고 나에게 현명한 답을 제시했다. 결정되고 나서 고민하자고. 아내의 현명한 대답도 좋았지만 휴가 일정이 어그러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짜증내지 않고 배려해 준 마음 또한 감사했다.
결국 8월 1일에 워크숍은 진행하기로 했고, 덕분에 나는 3박 4일의 휴가 중 2박 3일만 아이들과 같이 보내고 셋째 날 아침에 일찍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신나게 워크숍을 진행했다. 업체에서 자기 소개 시간을 꼭 넣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준비하는데 애를 먹었지만 오히려 새로운 기회도 고민할 수 있었다. 버킷리스트를 기반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프로그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선당후곰
"선당후곰"이라는 말이 있다. 신조어로 청약시장에서 일단 당첨되고 고민하라는 뜻이란다. 청약이 될 지도 안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우선 당첨 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https://www.ytn.co.kr/_ln/0102_202108121455429575
이 말은 작년 말 아내에게 처음 들었다. 베를린 마라톤 대회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베를린대회 신청을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신청한다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신청한 사람 중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추첨을 통해 결정되는데 (그렇다고 당첨자들에게 참가비용을 따로 대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그런 내게 아내는 선당후곰이라는 말을 알려주며 당첨 되고 나서 고민하라고 조언했다.
아내에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이거다" 싶었다. 사실 나는 아직 베를린 대회가 결정된 것도 아니었는데 먼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독일까지 갈 수 있을지, 코로나가 문제는 없을지 등등의 여러 고민들이 몰려왔다. 당연한 고민이었겠지만 당시 나는 굳이 그런 고민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아직 베를린 대회에 당첨된 것도 아니었으니 당첨 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 청약에 당첨되고 나서 계약을 할까 말까 고민해도 늦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적극적이지 못한 나의 태도에 대한 반성도 할 수 있었다. 도전해보고 고민해도 늦지 않은데, 나는 시도 조차 하지 않고 걱정하고 있을 때가 종종 있다. 하지도 않으면서 일을 그르칠까봐 걱정한다. 제대로 성취하지 못할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다. 하지만 선당후곰의 마음처럼 적극적으로 뛰어 들고 고민하는 무모한 자세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내 덕분에 좋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잇었다.
아내는 나에게 있어 삶의 동반자이기도 하지만, 종종 큰 깨달음을 주는 멘토같은 존재다. 덕분에 애매한 상황에 놓일 때면 나는 아내에게 물어볼 때가 종종 있다. 비록 아내가 귀찮아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귀찮다고 말한 적은 없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나를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아내에게 물어보는 것은 (영업 비밀이었지만) 아내에게 허락을 구하는 나의 전술이기도 하다. 물론 아내는 내가 한다는 것에 반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나로서 아내에게 물어보고 답을 얻는 과정은 아내에게 동의를 구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덕분에 나는 일타쌍피를 얻을 수 있었다. 아내에게 배우고, 아내에게 지지도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비록 아내가 이런 맥락을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결혼 생활도 15년째가 가까워지면서 오랫동안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게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연애 시절처럼 뜨거운 사랑을 15년째 계속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부부는 비록 뜨거운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또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관계로 살아가는 것 같다. 덕분에 든든한 내 편 하나가 뒤에서 받쳐주는 느낌이다. 물론 아내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지만 나는 그렇다.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서로에게 배울 수 있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