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감히 뒤집으면, ‘모른 만큼’은 모두 상상의 이미지다. 어떤 역사적 지식이나 정보도 없는 나에게, 수원 화성 모든 곳이 이미지 덩어리로 다가왔다.
나는 아기가 ‘숟가락’의 기능을 모르는 채 모양새를 즐기듯, 성곽길을 누볐다. 사전 공부를 하지 않은 핑계로 시작하는 글이 낯부끄럽지만, 무지 상태로 바라본 수원 화성은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망각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특히 성곽길에 뚫린 수많은 구멍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성곽 아래로 배롱나무가 보이는 구멍과 전방으로 버드나무가 보이는 구멍을 통과해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그 구멍이 근거리 적을 사격하기 위한 ‘근총안(近銃眼)’, 원거리 적을 쏘기 위한 ‘원총안(遠銃眼)’이란 사실을 알고, 이 구멍에 총을 올려 적군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병사의 조급함이란 어떤 것일지 상상해 보았다. ‘Shoot’이란 단어를 총이 아닌 사진기로 쓰게 되어 새삼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성곽길을 따라 오른 언덕에, 눈에 띄는 정자를 만났다. 뭔가 다르다고 생각할 때쯤, 누군가의 설명을 들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입니다.”
정조대왕이 음주를 즐긴 곳임을 듣고, 나는
“거참, 술 먹기 딱 좋은 날씨네!”
대사를 외치는 왕을 상상했다. 개인적으로 정조대왕은 근엄한 모습보다, 젠체하는 모습과 블랙 유머 가득한 입담에서 매력을 느끼곤 했다. 그러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정자에 앉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술을 마시는 모습이 일종의 슬픈 퍼포먼스라고 느껴졌다. 술을 삼킨 우아한 목젖과, 양 볼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에 스스로 감탄했을 것이다. 특히, 용연(淵)이라는 작은 연못과 조화를 이루는 방화수류정을 보고 있으니, 왕 스스로 멋에 취한 모습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듯 했다.
방화수류정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니, 길게 뻗은 천(川)이 나왔다. 우산 쓴 연인들과 물장난치는 아이들이 있어 사진을 찍으려는데, 모니터 속 사람이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반대쪽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었다. 뒤돌아보니, 내 위치가 수원 8경 중 한 곳인 화홍문(華虹門)이었다. 나는 천 길로 내려가 화홍문을 향해 카메라를 들어 화홍문 현판을, 쏟아지는 물줄기를, 그 위를 노니는 오리 가족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무방비 상태로 마주한 아름다움에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누르다 보니, 내가 여행 중이란 사실도 잊었다.
나의 여행은 ‘모름’을 전제로 시작해, 나중에 공부한 지식이 얹어져 엉성한 글로 마무리되었지만, 이 과정이 즐거웠다.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샹송이 좋은 이유와 같다, 랄까. 사격을 위한 구멍으로 버드나무를 감상한 기억, 멋에 취한 정조대왕을 상상한 기억, 아름다움에 반응해 셔터를 누른 기억에 감사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남아있는 발걸음의 감각이, 다음 목적지로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