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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숨 Oct 22. 2023

가을 재킷에 핫팬츠를 입어도 아무렇지 않은 곳

뉴욕 10박 12일의 기록 01

다양성이 공기처럼 흐르는 도시, 뉴욕

대학생 때부터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유럽, 아시아, 미국 등 나름 다양한 나라를 여행해 봤지만 특정 도시나 나라에 대한 로망이 있진 않았다.


그런데 뉴욕은 달랐다. 하늘을 끝없이 가로지르는 고층 빌딩이 즐비한 곳, 자본주의의 끝판왕, 다양성이 공기처럼 흐르는 도시. 나라도 아닌 고작 도시가 이렇게 매력적일 수 있나? 언젠가부터 뉴욕은 죽기 전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마음 속 꿈의 도시로 자리 잡은 곳이었다.


마침 돌아온 추석 황금연휴. 휴가를 며칠만 쓰면 무려 10박 여행이 가능한 일정이니 뉴욕을 가기에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나는 뉴욕이란 도시가 너무 궁금했고 당장이라도 가고 싶어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뉴욕 JFK 공항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뉴욕에 도착한 당일, 비행기가 곧 착륙할 시점인데 고도는 내려가질 않고 하늘 위에 계속 떠있기만 했다. 이어진 기장님 안내 방송. 비행기가 아직 착륙 신호를 받지 못해 하늘을 빙빙 돌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1시간을 계속 같은 고도로 돌아다녔을까, 착륙 신호를 받았는지 드디어 공항에 내려온 우리의 비행기. 나중에 들어보니 그날 뉴욕엔 역대급 폭우가 내렸고 고작 3시간 만에 한 달치 비가 쏟아졌다고 했다. 공항에 내리니 여기저기서 재난문자 경보음이 마구 울렸는데 이거 때문이었구나. 무사히 착륙한 것만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었어.


수하물을 찾은 뒤 미리 예약해 둔 셔틀에 몸을 싣고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달렸다. 1시간 쯤 지났을까? 뉴욕의 중심, 맨해튼에 도착! 상상만 하던 그 도시에 내가 와있다니! 지금 생각해도 벅찬 순간이다. 도착 당일은 장거리 비행으로 피곤하고 지친 몸을 회복하며 시간을 보냈고 푹 쉰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했다.


내가 뉴욕을 가장 기대한 이유는 바로 다양성이었다. 수많은 문화가 한 데 뒤섞인 멜팅팟(melting pot)의 도시,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이 공존해 있어 한 문장으로 이렇다 정의하기 어려운 도시. 그 모습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다. 호텔을 나서 거리를 조금만 걸었을 뿐인데 뉴욕은 이런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었다. 피부색, 옷차림, 헤어스타일 등 너무나도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래, 이걸 보려고 이 도시에 왔지!


누가 뭐라 하든 남의 시선 개의치 않고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는 사람들(웃통 벗고 러닝 하는 건 기본, 쌀쌀한 가을 날씨에 위는 재킷, 아래는 핫팬츠 운동복을 입은 사람도 봤다), 평일 오전에도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이 수두룩(어떻게 이런 여유가 있는 거지?), 아무렇지 않게 카페 안에서 입맞춤을 하던 게이 커플. 한국에서라면 무조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한 번쯤 받았을 장면들이 이곳에선 너무나도 당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그걸 특별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한 번은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포장해 온 베이글을 먹은 적이 있다. 넓은 테이블에 앉아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물고 있는데 앞에 아저씨 2명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영어가 들리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둘이서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가 아니네! 하며 혼자 속으로 놀랐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영어를 쓰겠지' 하는 나의 고정관념이 들통난 순간.


이후 뉴욕을 여행하면서 더 느낀 거지만 워낙 다양한 데서 온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가 뉴욕이기에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게 별 의미가 없는 곳 같았다. 어디서 무엇을 만날지 모르는 도시. 그래서 누구를 만나고 뭘 경험해도 이상하지 않은 도시. (뉴욕엔 정말,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다)


뉴욕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은 책에서 알게 된 내용인데 뉴요커들은 'Where are you from?', 즉 '어디에서 왔나요?'라는 질문을 민감해한다고 한다. 그 질문을 던진다는 건 상대가 외국인임을 내포하는 건데 이민자도 이방인도 워낙 많은 도시라 겉모습이나 억양만 가지고 외국인이라 판단하는 건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


그래서인지 여행을 다니면서도 어딘가 더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다양성이 넘쳐나는 이 도시에서 나 하나 또 다르다고 특별할 게 있나? 하는 느낌이랄까. 남의 시선도 덜 신경 쓰이고(사실 느껴지는 시선이랄 게 없긴 했다) 여기서 난 이미 이방인인데 훨씬 더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다른 도시였다면 초반엔 현지인들의 신기해하는 눈길을 받거나 혹은 받지 않아도 그것이 신경쓰이거나 했을 텐데 뉴욕은 여행 초반부임에도 그런 느낌이 없어 신기했다.


그렇게 이 도시 안에 흐르는 다양성의 물결에 몸을 싣고 나니 뉴욕,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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