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10박 12일의 기록 04
91층 높이 전망대에서 맨해튼의 화려한 야경을 실컷 감상하고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생전 처음 보는 높이의 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이 도시를 드디어 두 눈으로 보다니! 뉴욕 여행의 로망 하나를 이룬 순간이었다. 거대한 도시를 바라보고 서있으니 그와 대비되는 내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그간 걱정하던 것들이 얼마나 별 게 아닌지도 알았다.
전망대를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피크타임인 저녁 7-8시 사이라 그런지 사람이 유독 많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내 차례가 왔다. 지친 얼굴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서있는 미국인 손님과 안내해 주는 직원이 대화를 시작한다.
Where are you from?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뉴욕의 스몰토크 문화인가?'. 귀를 쫑긋 세우고 얘기를 엿들었다. 직원은 몇 년 전 텍사스에서 뉴욕으로 이사를 왔는데 이곳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손님은 미국 서부에서 뉴욕으로 여행을 온 것 같았다. 분명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각자의 얘기를 서슴없이 꺼내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이게 된다고? 나라면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어 대답만 하다 점점 말 수를 줄일 텐데. 처음 보는 타인에게 이렇게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라면 '타인이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선뜻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했을 텐데 어쩌면 저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부럽기도 하다. 그들의 스몰토크가 길어진다 싶을 때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직원은 'Have a good night' 인사와 함께 우리를 배웅했다.
스몰토크 문화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떻게 생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내 얘기를 마구 풀어놓을 수 있을까?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어쩌면 그 둘은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실제로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와는 별개로 어떤 얘기를 하건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 그리고 이 신뢰는 오늘 갑자기 만난 상대방이 준 게 아니라 원래부터 내가 갖고 있던 것일 테다.
나를 내보이면 타인이 이렇게 판단하지 않을까 하는 이 두려움은 어디서 왔을까, 진짜 필요한 걸까. 생각이 길어지는 와중 이것 하나는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 두려움이 없다면, 타인에게 신뢰를 가질 수 있다면 훨씬 편안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뉴욕의 스몰토크 문화, 꽤 괜찮은 것 같아. 그렇다고 먼저 시작할 용기는 없지만 스몰토크를 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면 피하지 않고 즐겨봐야지.
그날 밤, 한결 산뜻해진 마음으로 맨해튼의 밤거리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