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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rey Sep 25. 2022

당신 구애는 정말 못생겼군요

그들의 구애 애티튜드, 이대로 괜찮은가

길을 걷다가, 서점에서 책을 보다가, 쇼핑을 하다가, 전철을 기다리다가, 집에 들어가다가 나타나는 어떤 남자들이 있다. 여자들은 살다가 별의별 장소에서 이 사람들을 맞닥뜨린다.


시작은 똑같이 저기요, 로 열린다. 발화자는 주로 남성이다.


미리 말하건대, 이것은 ‘도를 믿으세요.’/ ‘인상이 좋으세요.’/ ‘학생이시죠.’/‘혹시 예술을 하시나요?’
같은 말을 시전 해야만 하는 가련한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이건 처음 보는 여자의 연락처를 물어보기 위해 다가오는 특정한 남자들의 구애에 대한 얘기다.

상대에게 매력과 호감을 전달해야 하는 구애자의 입장을 자처하는 사람들.

그러나 바람직한 태도를 갖추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입을 열면 불안해진다.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나면, 가끔 그 내용과 태도에 화를 참기 어렵다. 어수룩한 구애는 차라리 인간미라도 있지만 뻔뻔한 구애를 시전 하는 자의 무례함은 규탄받아 마땅하다.


‘관상은 사이언스’라는 우스갯소리, 나는 믿는다. 불쑥 나타난 낯선 사람에 대한 정보 값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인상을 더욱 유심히 보게 된다. 그가 나의 동년배로 보이는 남자인가? 혹은 스스로 충분히 젊다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로 굴고 있는 아저씨인가? 후자의 경우 정말 불쾌한 상황으로 흐르기 쉽다. 그의 생년월일 앞자리는 최소 8로 시작할 것 같다. 아마도 83, 82, 81… 간혹 7로 시작하는 사람이 데이트를 원하기도 하는데…. 오. 판단력 흐린 삼촌이시여. 집에 가서 발 닦고 주무시지요.



구애에 앞서 자기 검열을 하지 않는 남자가 과연 얼마나 안전할까? 남자가 긴장해서 쩔쩔매고 있다면 차라리 좋은 신호다. 아직까지는. 본인이 아무 공격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표시를 온몸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남성들은 드물다. 안전한 바디 랭귀지를 구사하고 정제된 언어를 쓰는 남성들은 애초에 모르는 여성의 연락처를 따내려는 시도를 하기 이전에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보고, 참을성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어떤 남자가 불쑥 연락처를 요청할 때, 그가 선한 의도를 가진 수줍은 사람인지, 혹은 어떤 폭력성이나 악의를 가진 사람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빠르게 스캔한다.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놈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나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일단 예의 바른 입매를 하고, 뒤에 이어질 멘트를 기다린다. 이렇게 밖에서 초면인 사람의 연락처를 대뜸 묻는 경우는 대체로 유형이 한정되어 있다.


나는 속으로 불안하게 중얼거린다. 제발 이상한 말만 하지 마.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먼저 건 쪽이 당신이니 부디 예의 있게 굴어줘. 나도 그쪽이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할 테니, 당신도 낯선 나를 매대에 걸린 물건이 아닌 동등한 인간처럼 대해줘. (혹시 사이코라면, 제발 나를 죽이지 마. 집에 가서 감자칩 같은 거나 씹으면서 당신 분노를 죽여. 여기서 살해당하려고 열심히 살았던 게 아니라고.)


주로 나오는 멘트는 이런 식이다.


a. “저기요...(바르르) 실례지만…” (사시나무형 선생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b. “제가 아까 ##서부터 따라왔는데요. 지나가다 우연히 봤는데 제 마음에 들어서...” (추적자형)
c. “보니까 좀 제 스타일이셔서. ”
(나는 당신 스타일이 아니고, 그냥 이게 내 스타일입니다. 주책 바가지형)
d. “혹시 책 좋아하시나요?/ 00을 좋아하시나 봐요~”
(다단계인가…? 흥미 유발 발표자형)
e. “(다짜고짜 어깨를 톡톡 치며) 저, 혹시 남자 친구 있으세요?” (기습공격형)
f. “아 남자 친구 있다고요? 얼마나 됐는데요? 헤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그쪽과 교제해야 할까요. 무단 예약형)
g. “그럼 친구 해요. 아 진짜. 뭐 사귀자 이런 거 아니고 친구. 솔직히 그건 할 수 있잖아요?”
(자네 같은 친구 필요 없네형)
h. “(절대 안 비키며) 연락처 주면 갈게요.” (신고할까… 협박형)


그들은 높은 확률로 이상한 말을 해버린다. 추한 태도로 못생긴 말을 한다. 나는 태도가 무례한 남성과 사적으로 엮이고 싶지가 않다. 당신이 어떻게 생겼든 간에, 외모나 스타일에 얼마나 자신 있든 간에 상관없는 일이다. 심지어 긴장한 와중에도 은연중에 으스대는 허세가 튀어나오는 분을 보면 감탄스럽다. 그 두 개가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 것인지, 참으로 신기하다.


문득 나만 모르는 채로 웹 상에서 못생긴 구애에 사전이라도 유통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이 든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트가 고플 때 무던한 태도로 이런 끔찍한 관용어들을 사용하는 것만 같다. 하나같이 투박한 데다 자기중심적인 미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구애의 마음 가짐이 꼭 이득 취득에 있는 것만 같다. 아래와 같은 말들은 나를 저 멀리 현타의 고원으로 보낸다.



<빈출 구애어 모음>

l  번호를 따다(능): 호감 있는 상대의 연락처를 물어 알아내다  

 예: 나 오늘 번호 따였다.  / 응용: 축약형, '번따'.


l  내 스타일: 마음의 드는 상대의 태나 외모를 보고 자신의 취향이라고 확신하다

예: 저 사람 완전 내 스타일이야.


l  친구 하다: 전후 맥락 없이 친분 관계를 급조하여 수작을 부릴 시기를 탐색하다.

예: 이것도 인연인데, 친구 하고 싶어요.



나도 모르는 새에 차원을 넘어 가임기 여성 박람회나 경매장으로 들어온 것일까? 심사위원처럼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여자를 훑어보며 고르려 드는 남자의 태도가 심히 괴랄하다. 장날에 잘 익은 제철 과일을 합리적으로 사가듯이, 놀이공원 사격장에서 어떤 물건이 그나마 쓸모 있을까 고민하며 5등 경품을 고르듯이 구는 그 태도에는 묘하게 시혜적인 태도가 배어 있다. 좀 전에 살짝 지켜봤는데 너 그럭저럭 괜찮아 보여. 웩!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여자를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도대체 왜 그러는가? 어떤 여자가 어여쁘게 치장했다는 것은 = 데이트 신청을 원합니다!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나는 그저 존재하고 걸어 다녔을 뿐이다. 나를 연애 시장이라는 상점에 내놓고 경매를 붙일 의도가 전혀 없다. 난 구매자를 찾는 게 아니다. 제발 차키나 시계 따위를 보여주지 말아라. 당신이 누구든 간에 나를 구매할 수는 없다. 나는 멋지게 보이고 싶지만, 모르는 남자 마음에 들 생각이 추호도 없다.


애인이 있으므로 그 낯선 남자들과 데이트할 수도 없다는 편리한 핑계도 있다. 싫다고 말했을 때는 집요하게 캐묻는 경우엔 그렇게 말해야 단념한다. 솔직하자면, 내가 애인이 없었더라도 다른 핑계를 찾아서 그들과 데이트하지 않았을 거다. 허영심이 있어 내 미감에 차는 외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지만, 그렇게 해서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유혹적으로 보이고 싶은 게 아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나는 나에게 가장 무난하게 맞는 멘트를 습득했다.
연락처를 달라기에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해봤다가 몇 번 피곤한 일을 겪고서야 정착한 표현이다.


“그러셨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면 대부분의 경우 별 탈 없이 원래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한편으론 여자들이 원치 않는 구애를 거절할 때 가장 무난하게 쓰는 변명이 ‘임자가 있어요’라는 현실이 편치 않았다.


여자도 거절할 수 있다. 그건 사람의 당연한 권리다. 싫어, 안돼. 를 말하고도 찝찝할 필요 없이 안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남자 친구가 없다고 판단하면 집요하게 연락처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발 좀 그러지 말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한 도믿걸이 당신이 거부하는데도 이 좋은 모임에 한 번만 와보라고 계속 요구하고, 집에 못 가게 하면 난감하지 않겠는가?


내가 가장 불쾌함을 느꼈던 케이스는 크게 두 건인데, 이 남성들의 태도가 하나같이 여자를 구매할 수 있는 재력을 갖췄다는 뉘앙스를 과시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외제차를 몰고 골목길까지 따라와서 차창을 내리고 번호를 요구했다. 그는 차에서 내리지조차 않았다.

'저기요! 저기요. 잠깐만요. 말 좀 물을게요.'나는 무슨 길이라도 묻는 줄 알고 멈춰 섰는데,
그의 다음 멘트를 들은 때가 제발 그런 친절함을 멈춰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나머지 한 건은 집 앞까지 쫓아와서 필로티 건물 앞을 막고 섰던 아저씨였다.


그는 정신없을 때까지 따라와서 말을 붙이며 본인의 재력을 과시하고 (그걸 내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으며, 설령 그렇대도 당신이 관리하는 사업체의 규모와 당신 자산이 나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 직장을 알아내려고 애쓴 끝에, 내가 못 이겨 그쪽 명함을 요청하자 명함을 주고 기어코 내 연락처까지 받아갔다.

그 사람은 거의 1년 반에 걸쳐 몇 달에 한번, 잊을만하면 메시지를 보냈다. 000님. 저 000입니다. 아직 남자 친구 만나시나요? 차단하고 기억에서 거의 지웠는데, 연초 즈음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았다가 그가 말을 하니 그제야 기억이 났다. 식겁해서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말하고 다시 차단했다.


아직도 그런 구애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소신발언하고 싶다. 여러분. 노 No는 결코 예스 Yes가 아닙니다.

 


여성의 데이트 거절을 납득하는 가장 힘센 기준이 당사자 여성의 의지나 마음, 결정권 보다도 현재 그 여성의 옆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상대의 여부라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여자가 무슨 주인에게 딸린 노예도 아니고, 나는 어느새 이상한 상상을 해본다.


들판에 포동포동 살이 찐 암소가 풀을 뜯고 있고, 발정기의 수소 한 마리가 온다.
수소 1: 음머--- (여보시오 암소. 그쪽은 주인이 있소? 너를 빌려가고 싶은데.)
 
암소: 머---(싫어요!)
수소 1, 콧김을 뿜는다. 암소 주제에 뭐라는 거야!
그때 웅장한 기세로 등장하는 수소 2. 수소 1은 물러난다.
수소 1: 음머어어. (아이고, 형님. 형님이 점찍은 암컷이라고요.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물론 나는 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우리가 가끔 가축처럼 취급받거나 거래되어도 괜찮은 개체처럼 취급되는 것이 속상해서 들어본 비유다.


젊은 남성들을 두고 딱하다는 말이 종종 나온다. 결혼도, 연애도 힘들어서 어떡하냐고. 데이트라도 하고 싶을 텐데 여자들이 그렇게 따지고 드니 불타는 청춘의 외로움이 참 안타깝다고. 여자들도 딱하다는 것을 아시는지 궁금하다.
 
 하물며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순수한 마음이나 순정이 진실이라는 것이 상대의 의사나 권리보다도 중요할까? 그들의 감정을 존중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요청하지 않은 애정에 보답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음에도 응답을 종용받곤 한다. '남자 친구 있다고?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 '싱글이야? 그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잖아.'


낯선 사람에게 호감을 느껴 말을 걸고 싶다는 욕망, 당연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 행위는 신중해야 한다. 그 사람과 꼭 닿아보고 싶은 의지를 참기 어렵다면 반드시 예의 바르게 다가가야 한다. 당신의 목적이 데이트라면, 혹은 운명적인 사랑의 성사라면 일단 화내지 말고 내 말을 믿어 달라. 구태여 못생기고 무례한 말로 상대를 당혹스럽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구애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면 말과 자세를 부디 가다듬길 바란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 어필하기도 전에 초를 치는 못생긴 말과 태도로 비혼 다짐 인구 증가에 남모르게 기여하지 말 길 바란다.

 


어떤 이들에겐 미움 받을 글임을 알고서도 이 이야기를 발행하는 이유가 있다.


최근 뉴욕의 한 행사장에서 나온 나랏님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일명 ‘조 날리면 Jo nalimyun’ 미국 대통령과의 단 48초의 짧은 회동 직후, 대통령께서는 멋쩍었던 건지 행사장을 벗어나는 자리에서 카메라를 의식하고도 비속어와 욕설을 내뱉었다. 그 영상을 보고 묘한 기시감이 드는 건 왜일까.


무엇이 그들이 못생긴 구애를 하고도,

본인이 화를 내도 된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연일 뉴스에서는 폭력에 노출된 여성이 등장한다. 어떤 남자를 만나주지 않는다고, 이별 통보를 했다고, 더 이상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고, 죽임을 당한 여자들의 피해를 접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피해는 복구되지 않고, 사법부의 판단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창창한 장래를 참작하는 쪽으로 기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것’을 구하도록 상대를 설득하는 요령이나, 거절을 의연하게 수용하는 방법을 교육하는데 성공하지 못했기에 이런 일들이 자꾸만 생긴다는 생각이 든다. 오직 남성에게만 ‘거부’를 건강하지 못한 분노로 치환해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허용해 온 아량이 지금의 문화를 키워온 것은 아닌가.


당장 우리 일상에서만 해도 그렇다. 본인을 상대해주지 않는다고, 상대를 마치 신포도를 취급하듯 모욕하거나 위협하는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그냥 웃기는 철부지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도 되는 것일까. 거절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들이 그다음엔 어떤 행동을 실행에 옮기려 할까.


차라리 우리 모두의 안녕과 한민족의 인구의 최소 보전을 위해 남성들에게 상대를 존중하는 구애를, 여성들에겐 안전한 거절을 알려주는 시민 교육이라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안전을 위해 못생긴 구애를 최대한 ‘나이스’하게 피해 다니려 애쓰는 입장으로 그것이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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