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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rey Aug 17. 2023

이녀석 고양이

길에서 만난 인연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나는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른다. 고양이를 키워본 적도 없다. 근데 어떤 길 고양이 생각을 너무 자주 하고 있다.  그 친구 코 옆에는 둥그런 황토색 무늬가 있다. 왼쪽 자국이 더 커서 꼭 갈색 수프를 먹다 묻힌 거 같이 생겼다. 오른쪽 무릎 뒤에 엄지손톱만 한 까만 반점이 있어 식별하기 쉽고. 보송보송한 발에는 흰 양말을 신었다. 회색과 고동색이 드문드문 섞인 거 같은 멋진 털을 가진 애다. 나는 걔를 미미르라고 부른다. 이 녀석을 처음 만난 건 두 해 전의 일이다.


그전에는 짝발이라고 부르던 한쪽 발이 새카만 고등어 태비에게 밥을 주곤 했다. 순하고 뚱뚱한 짝발이는 작은 공원 구석에 퍼지게 누워있길 좋아했다. 사람도 좋아해서 아무나 보고 발라당 몸을 뒤집으며 애교를 부리던 애라서 저러다 해코지당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언젠가부터 짝발이가 드물게 보이기 시작했다.


짝발이가 있던 자리에는 눈이 똘똘하게 생긴 어린 고등어 태비가 돌아다녔다. 공원의 새로운 짱이 된 어린 고등어는 싸움을 잘했다. 다른 고양이들과 사이좋게 지내지도 않았다. 걔가 나타난 뒤로 집 근처에 자리를 잡던 다른 고양이들이 슬슬 자취를 감췄다. 뒷다리에 까만 점이 있는 이 고등어 태비는 다른 고양이가 영역에 들어오면 몇 분이고 몸을 세우고 앉아서 끈질기게 주시했다. 상대가 슬슬 앞으로 들어오면 무섭게 쫓아가는 게 거의 깡패 같았다. 분명 짝발이도 저렇게 쫓아내고 밀어냈겠지.


나는 아무래도 그 녀석이 좀 얄미웠다. 날렵한 움직임은 뭔가 정이 없어 보이고, 눈빛도 매서워 보였다. 성격도 야무져서 아무에게나 인사를 하지 않고 먹을 걸 줄만한 인간에게만 말을 걸었다. 만나면 밥이야 가끔 줬지만, 예뻐하지 않고 그저 일어서서 바라보며 맘 속으로 ‘너가 짝발이를 때렸지? 쫓아냈지?’ 하면서 이죽거렸다.

 

얼굴을 튼 지 시간이 좀 지났을 때, 고등어 태비에게 멋대로 이름을 붙여주었다. 계기는 영 이상한데, 그날 게임하다 우리 팀을 많이 사살한 상대편 플레이어 닉네임을 따서 미미르라고 불렀다.


알고 보니 미미르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요툰으로 지혜의 샘을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한다. 오딘의 한쪽 눈을 가져간 신이기도 하다. 호, 살벌하잖아? ‘미미르 더 캣’! 다른 길냥이들을 제압하며 영역을 지키는 이 고양이의 성격과도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았다.




7월 11일

이름을 지어줬더니 녀석을 얄미워하기 참 어려웠다. 길에서 만나면 꾸준히 밥을 먹이고 털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알고 지낸 게 두 해가 넘었다. 그만한 책임감도 없는데, 어느새 나는 일 년 넘게 미미르의 밥을 주기적으로 주고 있었다. 미미르는 두 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에도 용케 죽지 않고 신길동 공원 앞을 지켰다. 날렵했던 몸통엔 금세 두텁게 살이 오르고 가슴에는 부숭부숭 털이 쪘지만 눈빛은 한결같이 총명하다.


그래서인가? 길고양이 치고 튼튼해 보인다. 털도 많고 부드럽다. 아마도 양호한 영양공급이 준수한 때깔에 한몫 차지하고 있을 듯하다. 미미르는 지금껏 길에서 자기에게 밥을 줄만한 인간에게 슥 다가가 귀여움을 받고 고양이 기준으로 먹을 만한 음식을 공급받아왔다. 식성이 아주 까다롭지는 않으나 분명히 취향이 있다.


미미르는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는다. 버려진 사람음식 찌꺼기를 먹는 모습도 본 적 없다. 처음 편의점에서 파는 캔을 시도했을 때, 몇 입 맛보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동네 캣맘이 소분해서 길목에 두는 저가 사료는 먹을 게 떨어졌을 때만 가서 뜯어와서 먹었다. 가장 잘 먹는 캔은 의외로 저가 제품인데, 프로베스트사의 참치와 치어, 참치와 게맛살이다. 밥 먹는 동안 옆에 앉아 있으면 참치는 별로 안 좋아하고 치어랑 게맛살만 은근슬쩍 빼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건식 사료를 본체만체하는 미미르에게 밥을 안정적으로 먹이기 위해 요즘은 아기 고양이들이 먹는 사료를 주는데, 아주 잘 먹는다. 가끔 만날 줄 알고 아기용을 샀더니 근래 두어 달 사이에는 거의 일주일에 네 번은 만나고 있어서 이렇게 자주 아기사료를 먹어도 되는지 조금 걱정이 된다.


사실 걱정되는 건 사료뿐만이 아니다. 이제 저녁에 만나면 미미르가 먼저 나를 부른다. 자주 만나는 골목을 기웃대고 있으면 어디선가 톡 튀어나온다. 그러곤 눈을 꿈뻑이며 냐아- 냐야 인사하고 꼬리를 위로 바짝 세우고 다가온다. 수다쟁이처럼 먀! 하고 울며 몸을 부딪치고, 다리 사이에 들어가고 머리를 한번, 두번, 세번, 네번, 계속 부빈다. 미미르를 만나고 오는 날은 현관에서 돌돌이를 두 장씩 쓴다.


미미르와 너무 친해진 건 나한테 기쁜 일이지만 애한테 위험한 일이다. 지금껏 미미르는 야생과 인간중심의 도시 사이에서 생존하는 요령을 균형 있게 발휘해 왔다. 한결같이 깨끗하고 토실토실한 걸로 보아 자기 영역을 잘 지키면서 먹이를 수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도 미미르는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개나 이상하게 걸어오는 중년 아저씨는 잘 피해 다니고, 사람에게는 잘 얻어먹고 다녔다.


하지만 엉덩이를 깔고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미르는 우리를 만났던 장소에서 더 오래 배회하고, 차 아래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듣고, 나나 조조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사람에게 기웃대며 인사해 본다. 도심 골목길에 사는 야생 개체를 길들이는 건 위험하다. 인간과 밤거리에 같이 어울리거나, 길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미미르는 더 많은 행인의 시선을 받고, 다짜고짜 카메라 플래시를 들이대는 무례한 사람들에게 훨씬 자주 노출된다.  



8월 7일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사실 그전까지는 미미르에 대해 쓸 만큼 내 생각이 많지 않은 줄 알았다. 미미르를 생각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이상하다. 만난 지 2년이나 됐는데 이제 와서 왜 이렇게 애가 눈에 밟히고 욕심이 커지는지 나도 이유를 알고 싶다.


한 달 반 만에 위스커스사의 아기 사료를 비워서 그 사이에 사료를 바꿔주었다. 미미르가 밥그릇을 비우는 빈도가 좁혀지고, 식사를 하러 찾아오는 규칙성이 점점 또렷해지기에 왠지 계속 아기 고양이용 사료를 주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사료 냄새는 상당히 shit 같았다. 동네 이마트에는 약간의 옵션이 있었다. 매대에서 짧은 검색을 하고 닭고기 원료 함량이 높다는 몰리스 성묘용 제품을 골랐다. 다행히 미미르는 바꾼 사료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았다. 섞어서 급여 한지 이틀 만에 코를 박고 먹는 모습에 내심 놀라고 흐뭇했다.


미미르를 만나는 시간은 주로 밤 9시 30분에서 11시 사이다. 보통 저녁 운동 다녀오는 길에 마주치는 날이 많다. 걔가 나를 찾아낼 때도 있고 내가 걔를 찾아낼 때도 있다. 미미르가 먼저 나와있지 않은 날, 골목에서 신호음을 내고 기다리면 3분에서 5분 내로 나타난다. 나는 쓰다듬기와 사람 말로 인사를 하고 걔는 눈인사와 머리 비비기를 동원해 인간 대상 고양이어로 말을 건다. 밥을 가지러 가면 미미르는 왜애앵! 하면서 냉큼 따라오고-(이때 앞발을 신나게 털면서 잰걸음으로 가느라 왜-애-앵! 에 헐떡이는 높낮이가 생기는데 그게 아주 사랑스럽다.) 내가 집으로 쏙 들어가 사료를 담아 오는 동안 1층 입구에서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우리의 패턴이다. 미미르가 여기서 밥을 먹는 동안 나는 집 앞에 앉아서 기다리곤 했다.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혹시라도 누가 밥을 치우거나 쓰레기를 넣을까 봐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물론 이것은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다. 미미르가 내가 사는 건물까지 따라오면서 아예 가까운 곳에서 놀아주다가 정착된 습관인데, 어리석게도 이제야 좀 후회가 된다. 버스 정류장과 가까운 내 집 앞은 오가는 사람도 너무 많고 차가 많이 지나다닌다. 버릇을 완전 잘못 들였다.


만나면 먹이를 규칙적으로 준다는 확신이 들어서 그런 걸까? 미미르는 이제 밥보다 사교를 원하는듯한 행동을 자꾸 보인다. 주는 밥을 먹는 시간보다 머리를 비비고 옆에 배를 깔고 앉아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밥을 조금 먹고 쓰다듬을 받은 미미르는 손이 닿는 거리에 엉덩이를 보이고 앉아서 천천히 꼬리를 좌우로 흔든다. 오가는 사람들을 나른하게 구경하고, 산책하는 개들이 다가오면 위험레벨을 측정하듯이 또렷이 쳐다본다. 자기랑 체급이 비슷한 강아지에게는 별 관심이 없지만, 큰 개나 퍼그 같은 애들은 구면이라도 멀어질 때까지 주시한다. 나는 미미르가 겁먹는 게 싫어서 같이 개를 쳐다보거나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날로 벽을 친다. 평소에 개도 고양이도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미미르에게 다가오는 개들의 권력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그 사이 미미르가 좋아하는 쓰다듬기 방법도 몇 개 터득했다. 손바닥을 두텁게 구부리고 눈썹 위부터 뒷목까지 쓰다듬어주면 고개를 바싹 들고 눈을 가늘게 뜨며 좋아한다. 귀 아래 옆얼굴과 턱을 살살 긁듯이 간질여주면 고개를 꺾으며 얼굴을 바싹 댄다. 솜방망이 같은 하얀 앞발을 모아 바닥을 꼭꼭 누르는 미미르를 보면 그 순간이 참 평화롭다고 느껴진다.


아, 엉덩이도 자주 드민다. 어디서 이것이 고양이가 자기 페로몬 냄새를 맡게 하려는 행위라는 걸 주워 읽은 뒤로 미미르가 꼬리를 치켜들고 엉덩이를 보여주면 나도 괜히 과장되게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준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머리꿍을 유발한다. 이때 엉덩이를 너무 빠르게 팡팡 치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같다. 가장 적절한 강도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보다 작은 존재에게는 가능한 살살 대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30분, 40분이 훌쩍 흐른다. 예전에는 넉넉히 쓰다듬으면 미미르가 쭉 기지개를 펴고 알아서 먼저 가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제는 30분씩 시간을 보내도 먼저 가질 않아서 내가 먼저 뒷모습을 보이는 날이 대부분이다. 불쑥불쑥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되면 나는 밥그릇을 골목길 틈에 있는 은신처로 옮기기 위해 일어난다. 그리고 뒤돌아서 미미르를 본다. 바로 따라올 때도 있고, 일어나기 싫어할 때도 있다. 그러면 나도 이제 가자고, 입소리를 내거나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춘다. 그러면 미미르는 껌뻑껌뻑 쳐다보다가, ‘벌써 가?’ 하는 듯 천천히 일어나서 따라온다. 은신처에 밥그릇을 놓아주면 어슬렁어슬렁 걸어와서 밥에 머리를 쿡 박고 조금 먹는다. (마치 ‘그래그래. 여기 밥 있는 거 알아’, 하고 안심시켜 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날의 마지막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인사하듯이 걔도 야옹- 울고 머리꿍을 두어 번 한다. 몇 걸음 따라 나와서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엎드린다. 그러면 나는 ‘안녕, 내일 또 와!’ 하고 간다. 집에 가는 걸 아는지 그때는 대부분 따라오지 않는다. 고양이는 참 영리한 거 같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전에 고민해 본 적 없던 감정이 스며들었다. 이전엔 길고양이에게 그냥 간간히 밥이나 주는 게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게 부끄럽기도 하고, 내 행동이 나 자신과 미미르의 안전에 위험 여지를 더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한다. 어쨌든 나는 혼자 사는 젊은 여자다. 훤히 오픈된 장소에서 밤 시간에, 일정하게, 장기간 고양이 밥을 주고 체류하는 간 큰 짓을 하고 있으니 주민들이 내 얼굴을 충분히 식별할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나도 그 시간대에 산책 나가는 동네 주민들과 강아지를 얼추 익혔으니 말이다.


매주 미미르와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는 길 위에 자신을 노출하게 된다. 그건 좋지 않다. 자주 마주치는 개주인들은 산책하며 한두 마디씩 던지곤 한다. “야옹이 밥 먹네~”, “어쩜 저렇게 딱 붙어있지?”, “개냥이 안녕~”, “키우는 거예요? 어머, 아닌데 저런다고요?”


 지나가면서 유심히 쳐다보거나, 걸음 속도를 줄이거나, 십 미터 안팎에서 딴청을 피우는 듯 얼쩡거리는 다양한 연령대의 남자들을 본다. 앞 집 아저씨는 담배 피울 때 대놓고 우리를 정방향에서 쳐다본다. 조용한 이웃이지만, 연초 태우러 너무 자주 나와서 이미 포기했다. 몇 달 전에는 얘 밥 주는데 웬 총각이 뒤에서 나타나서 연락처를 달라고 해서 언제부터 식별된 건가 싶어 식겁했다. 내가 이렇게 조심성이 없다.  


최근에는 길 가다 우뚝 멈춰서 길고양이가 사람한테 붙는 게 보기 싫다며 혀를 차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런가 하면 오랜만에 본다고 기뻐하며 나비야, 너 잘 지냈어, 하며 주머니에서 까만 봉지 담은 사료를 꺼내 놀이터에 놓아주는 할머니도 보았다. 미미르와 같이 나와 있는 동안 오래도록 이 고양이를 보고 기억했던 어르신 몇몇이 반가워하는 소리를 듣고, 아가씨가 그동안 밥을 챙겨 주었냐며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


가끔 귀엽다고 큰 소리로 한달음에 와서 “야옹이!”하고 끔찍한 사람들도 있다. 냉큼 뻗는 손에 화들짝 놀라서 움츠리는 미미르를 볼 때면 이 녀석이 아무리 여러 길냥이를 쫓아냈어도 인간 앞에서는 힘없는 네발짐승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서 마음이 쿵쾅댄다. 나도 그러면 화가 나서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홱 쳐다보게 된다. 다른 인간 뒤로 숨어 꼬리를 내리는 미미르를 마주하면 제아무리 고양이 귀여워를 시전 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대화 없는 순간의 실랑이를 하고 나면 아차 싶은 마음과 분한 마음이 섞여서 밤 시간이 어지럽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이 애의 길-보호자가 된 기분이다. 그제야 조금 깨닫는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


종종 마주치는 주민들 중에 선의를 가지고 음식을 챙겨 오는 분들도 있다. 수줍게 먹여보고 양보하듯 금방 사라지는 아가씨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런데 이분들이 먹을 걸 건네는 동안 미미르가 내 무릎 옆을 떠나지 않고 머리만 빼놓은 채 먹이를 날름 받아먹는 짓을 계속 한 바람에, 최근엔 간식주기를 포기했는지 저녁 시간대에 간식을 가져오는 젊은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내가 이기적인 마음에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서 이 동네에 있는 돌봄의 가능성을 고립시킨 걸까?


특유의 불안 습관과 PMS가 겹치며 나는 점점 미미르를 데려오는 상상을 비중 있게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땅한 경험과 안정적인 환경도 없이 미숙한 내가 어떻게 생명을 데려와? 원룸에서 어떻게 고양이를 키울 수가 있겠어? 하는 생각으로 철벽같이 한계를 쳐두고 밥이나 주는 길친구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묘연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상황인 건 아닐까 망상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꿈에도 자꾸 미미르가 나왔다. 맹세코 나는 진지하게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내가 고양이 집사가 된다는 상상을 하면 아주 내키지는 않는다. ‘미미르’라서 자꾸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원래 내 유튜브 앱에 들어가면 피트니스 동영상이나 베이킹 레시피가 부동의 1위였는데… 지금은 상단에 고양이 동영상이 몇 개씩 뜬다. 검색창에 ‘길고양이구조’, ‘길냥이 입양’, ‘고양이 키울 때 원룸’ 같은 건 진즉 검색해봤다. 혹시라도 행복회로를 돌릴 수 있는 비슷한 선행 케이스가 있을까 찾아봤기 때문이다. 밤이면 멍 때리면서 고양이 수의사 채널 미야옹철의 냥냥펀치를 자꾸 틀었더니 이제는 볼 영상이 없어서 맘이 허하다.  


내가 사는 공간은 정말 인간 1인용 토끼굴이다. 중문도 없고 방충망도 낡아서 여차하면 탈출하기 쉬운 구조다. 해가 감질나게 들어오고 하늘도 잘 안 보인다. 길에서 많은 걸 구경하고 넓은 영역을 구축했던 미미르에게는 무료할 것이다. 화장실을 놓을 공간도 마땅찮다. 게다가 아침과 주말 낮에는 복도소음이 거슬릴 정도로 잘 들린다. 미미르를 여기 데려오면 선 자리 시야각 안에서 모든 생활 반경이 다 보이는 갑갑한 환경을 주는 셈이 된다.


하지만 여긴 자동차도 없고, 위협할 사람도 없고, 적어도 푹신하고 따뜻할 거다. 나는 미미르에게 예방접종을 해줄 수 있고, 아픈 곳이 있는지 기초적인 의료검사를 받도록 병원에 데려갈 수 있다. 식구가 된 고양이에게 건강한 식사를 챙겨주고, 화장실 모래 자주 갈아주고, 매일 사냥놀이를 하고, 바깥보단 좁겠지만 좀 더  깨끗한 수직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자, 어쩔래 미미르? 네가 선택해 볼래? 하지만 나는 고양이말을 할 줄 모르고 미미르도 사람말을 할 줄 모른다. 미미르가 겨울이 되기 전에 집에 따라 들어오면 키우라는 뜻으로 알고 받아들일까. 운명에 결정을 맡기는 바보 같은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결국 내가 사는 방은 고양이를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떤 욕망은 애초에 깨워서는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나는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싸우는 성격이 못된다. 열기 전엔 바라는 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괜찮다. 하지만 내가 그걸 원한다는 걸 알면 그때부터 문제가 복잡해진다. 한번 생각을 구체화하게 되면…. 그 뒤로는 걷잡을 수가 없다. 그냥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어떤 대상을 떠올리고, 애정을 주고 확인하고 싶어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걸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난주에 북어트릿과 캣닢과 박스를 샀다. 새까만 속마음으로 미미르가 집에 따라오르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북어트릿 반응이 상상이상이다! 고양이가 북어트릿을 이렇게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최근에 미미르가 현관까지 들어와서 밥을 조금 먹기는 했다. 엄청 경계하면서 금방 도로 도망갔지만….


나는 또 애를 쓰다듬다가 불쑥 사람말로 조그맣게 물어본다. 미미르, 우리 집에 올래? 나랑 같이 살아도 좋아? 복슬복슬한 앞발만 모으고 꼼지락 댈 뿐 미미르는 대답이 없다. 어느 방향이든, 올해 안에 애정의 무게의 책임을 치러야 할 순간이 찾아올 거 같다.


요즘 자꾸 두렵다. 경계심이 느슨해져서 사람들에게 확신 없이 말을 거는 미미르를 길에서 발견할 때 두렵다. 튼튼해 보이는 미미르가 편안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 문득 두렵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그 녀석을 다시 보지 못할까 봐 두렵고, 흉곽이 비뚤게 들뜨듯 숨을 쉬는 모습을 볼 때 사실은 얘가 어디 아픈 곳이 있을까 봐 두렵고, 눈앞에 둔 먹이를 바로 못 찾고 바닥을 훑는 모습을 볼 때 얘가 사실은 내 생각보다 시력이 약한 상태일까 봐 두렵다.



그냥 고양이라고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바랄 필요가 없었고, 조금 좋아할 때는 조금 걱정할 수 있었는데… 무심하고 약삭빠른 고양이가 살기 위해 애타게 노력하는데, 나는 그 모든 행동에 한껏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 관계의 틈을 파고 끈질기게 조른 건 고양이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졸졸 따르는 녀석을 한껏 길들이고 죄책감과 욕심에 버둥거리는 꼴이라니! 사랑을 마주한 나는 참 아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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