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부력(제4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이승우 외]
1.
카메라의 아웃 포커싱 기능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그 메커니즘이 우리 인간의 눈이 작동하는 방식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눈은 우리가 특정 사물을 바라볼 때, 보고자 하는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주변부를 뿌옇게 처리한다. 아웃 포커싱 된 사진은 그래서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좀 더 현실적인 사진처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승우 작가의 글이 좋았다. 스토리의 진행 자체에 초점을 맞춰 다이내믹한 기승전결과 강약 중강약이 나이스하게 펼쳐지는 글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그러한 플롯의 수평적 전개가 너무 흥미에 치우치거나 또는 너무 상징적이기만 한 경우 보조적인 해설이 없다면 이해하기 힘들다. 실제로 우리의 삶도 그렇게만 진행되지 않는다. 아무런 여유 없이 바쁘게 흘러가버리는 날도 있지만, 보통은 어떤 행동과 사건과 상황들이 벌어지면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거나 생각을 한다. 짧게는 몇 초 머물다 날아가지만, 길게는 그 생각이 며칠을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도 한다.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과 그 틈새 사이사이의 수직적 사고들이 진행되고 멈추기를 반복한다.
내가 이승우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수평과 수직의 삶이 겹쳐져있다. 수평의 흐름에 나도 같이 떠내려가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자꾸만 발등을 수직으로 세운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가지만, 적어도 그 발등이 저린 만큼의 시간 동안은 나는 삶을 위아래로 내려다본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하고 후회도 한다. 어떤 미래의 시간을 떠올리기도 하고, 어떤 일이 맘처럼 잘 안되었을 때 무엇을 할지도 생각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도 한다.
이승우는 작품을 통해 인물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때로는 거실에 가만히 세워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 한참 시간을 보내게도 한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신학을 공부하며 진중한 고민을 반복했을 작가를 닮았다.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사색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언젠가 한 번쯤은 보냈어야 할 어떤 시간처럼 보인다. 그 고민의 답을 끝끝내 생각해내지 않고서는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놓으려 해도 놓아지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힌다. 우리가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이 과정을 계속 보게 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답을 얻는 건 결국 글을 읽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고통스럽고 집요한 고민을 반복한 덕분에 나는 대신해서 그 문제의 힌트나 답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이승우의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스토리가 곁들여진 인문학 서적처럼 느껴진다.
2.
내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사랑의 생애'는, 사랑이 시작되어서부터 깊게 무르익고 떠나기까지의 여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고, 그 틈새를 사랑에 대한 수많은 고민과 답으로 채워 나갔다. 덕분에 나는 비어있던 사랑을 둘러싼 관념이나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대방의 심리, 감각들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고 생각해볼 수 있었다. 지나간 애인들과의 상황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내가 무엇을 했어야 하는지, 왜 내가 그런 감정이었는지 뒤늦게라도 공감하고 재해석할 수 있었다.
이번 '마음의 부력'에서, 작가는 가족 간의 거리, 좀 더 정확히는 부모님과 자식, 자식 간의 거리와 균형에 대한 고민들을 이야기한다. 동생인 성식은 우리 집 내에서 나와 여러모로 닮았다. 두 살 위 누나와 나의 관계, 부모님과 우리 둘의 관계에서 소설을 읽는 내내 기시감을 느끼는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더욱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누나와 나의 관계에서, 나는 늘 좀 더 배려받고 혜택 받는 막내였다. 부모님이 설마 차별을 하겠냐는 일반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나는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식이 느낀 부담과 부채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고생한 만큼의 결과를 얻었던 나와는 달리, 누나는 수능을 세 번 치렀음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우연히 들어간 누나 방 책상 한편에서, 누나의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 대학 지원 배치표를 보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삼수하던 해에 나와 같은 시험을 보고, 다른 결과를 고민하고 있었다. 착한 누나, 공부에 욕심이 없었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받고 싶은 사랑도 많았던 누나는, 늘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우리 집 공연에서 늘 조연이나 배경을 맡았다. 그나마 소설과 달리 다행이라 생각하는 건, 나는 부족하게나마 그런 마음을 갚을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들로서 또는 단순히 다른 짓을 할 베짱이나 용기가 없어 그냥 시키는 것만 했더니, 얻게 된 우연한 '성실과 모범의 캐릭터'가 결코 나의 몫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더불어, 딸로서 또는 잔다르크와 같은 용기와 가녀린 감성, 그리고 남다른 예술적 역량을 가진 누나가 얻게 된 '일탈과 불성실, 제도권 밖 캐릭터'가 결코 누나의 정당한 몫이라 생각지도 않는다. 누나는 어쩌다 누나의 삶을 살게 됐고, 나는 어쩌다 내 삶을 살에 되었을 뿐이다. 우리의 엇갈린 운명이, 엇갈린 현재의 주머니 사정이나 마음의 여유가 결코 누군가의 커다란 잘못이나 응당 정당화될 보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누나에게 계속해서 베풀 것이다. 그게 내가 운 좋게 얻게 된, 그러나 동시에 부담과 부채를 가지게 만든 '내 것이 아님'에 대한 순순한 인정이자 고백이다.
작가에게 늘 배운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강의를 듣는 기분이고, 믿을만한 인생 선배에게 듣는 술자리 조언이나 철든 친구의 솔직한 고민이 담긴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나는 또 맘 편히, 무책임하고 서툴게 살다가 책을 폈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에 신세를 진다. 수평의 시간들 속에서 자꾸만 수직으로 내려가는 사람. 그러다 마주치는 얼굴이 반갑다. 어쩌다 지나가는 길이면서, 나는 자주 또 익숙하게 오갔던 척을 한다. '안 그래도 나도 이 고민하고 있었는데, ' 그는 나를 다그치는 대신 이야기한다. 묵묵히 보여준다. 이런 선배를 알게 되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