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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yner Dec 10. 2022

기록 #324935251ap-331F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어려서 나는 궁금한 게 많았다. 지구는 하필 왜 이렇게 생겼고, 1초는 하필 왜 그 정도의 시간이고, 나는 어떻게 이 우주에서 희박한 가능성을 가진 이 행성에서 하필이면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이 삶은 첫 번째일까 두 번째일까, 텔레비전으로 보는 우주는 정말 존재하는가, 과학자들이 하는 말들은 다 사실일까 아니면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이 모든 게 나를 위해 잘 짜인 연극은 아닌가,  내가 지금 하는 이 생각들을 대체 어떤 방법으로 왜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무엇이고 이 삶은 무엇인가. 많은 것들이 궁금했고, 대부분 나는 그 해답을 찾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런 질문들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밀려드는 눈앞의 일정과 과제를 소화하기 위한 단편적인 질문을 했다. 시험 범위는 어디까지예요? 왜 여기서 10을 곱하는 거예요? 이 문제의 답은 왜 3번이에요? 더욱 문제는 그 이후였다. 단순하고 일방적인 학습의 결과로, 생각은 더 펼쳐지지 못하고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 전제를 흔드는 질문과 논의는 곧 과거에 대한 부정이었다. 프레임과 대전제를 의심하지 않고, 배운 대로 아는 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맺었다. 틀을 벗어난 답은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배제되어도 괜찮았다. 나는 하나의 잘 훈련된 사피엔스였다. 의심 없는 안정과 만족의 테두리 안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것은 내 문제라 생각했다.



'사피엔스'를 읽는 내내 즐거우면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미시의 영역에서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유발 하라리는 인류 문명의 거시적 흐름을 이야기하고 수만 년, 수십만 년의 시간 차이를 거리낌 없이 이동하며 주목해야 할 장면들을 짚어주었다. 덕분에 그동안 내가 파편의 형태로만 가지고 있던 인류 문명의 발자취와 의미 있는 사건들을 어설프게나마 이어 붙여 볼 수 있었다. 마치 걸어만 다녀서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던 골목 거리를, 지도 어플을 줌 인/아웃해가며 위에서 내려다보고, 다른 골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거나 로드뷰를 사용해 좀 더 확대해서 보는 듯했다. 생물학에서 시작해, 문화, 정치, 제도, 법률, 심리, 종교, 사회 갈등과 같은 여러 장르의 학문을 넘나들며 인류가 걸어온 길을 가늠하고 추측해보았다. 이종 학문들이 가지고 있는 단서들을 통섭적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얻은 종합적인 시야로 바라본 세상과 사건에 대한 해석은 합리적이고 흥미로웠으며, 이따금씩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주어진 테두리들에 대한 의심을 조금은 더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할 수 있게 될 것 같아 반갑다. 인간이 걸어온 이 길과 지금의 장면들이, 우리의 유산과 스토리와 배경과 등장인물 간의 심리적 갈등들이, 결코 정의를 위하거나 인류의 행복을 위해 달려오지 않았다는 사실 덕분이다. 하필 왜 이런 상황에 이런 이해관계자들이 뒤엉켜 있고, 하필 그 갈등의 결과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어 가는지 이제는 조금은 더 알 것 같다. 당연한 듯 보였던 산과 나무, 바다는 인간의 등장으로 어떻게 변하고 달라져왔는지, 우리의 신체와 정신은 어떤 메커니즘을 따르고 작동하는지, 우리가 만들고 따르는 제도와 정책, 정치 이념과 경제에 대한 가상의 약속들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동안엔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건지 뒤늦게나마 들은 기분이었다. 기술과 자본의 발달, 문명과 제도의 진전에도 우리 인간 개개인이 왜 그만큼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우리가 간과하거나 잊고 있던 빚은 없는지, 오랜 시간 일관성 없이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시스템들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역사의 끝자락에 등장해 어리둥절한 사피엔스 하나가 그래도 조금은 상황 파악을 하게 되었달까. 한계로 가득한 이 찰나의 삶에서 무엇을 바라고 원할 것인지, 그것을 위해 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버릴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기대한다. 재배 방법과 원산지, 빈티지와 유통 방식이 만들어 낸 차이와 효과, 그 의미를 알고 나서 마시는 와인 한잔은, 그 전의 한 잔과는 다를 것이므로.



습지와 평야를 전전하던 사피엔스 하나가 어느덧 어정쩡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았다.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은 낯선 기계를 응시하며, 아직 입식 생활이 익숙하지 않아 허리와 목은 살짝 굽었다. 그가 움직이는 불규칙한 손마디에 전기 신호를 따라 앞의 벽면에는 무엇인가가 줄 맞춰 입력되고 있다. 이 기괴한 장면이 가지는 역사적 과학적 문명적 가치와 우주적 신비로움에 대하여, 앞으로 더욱 곱씹을 거리가 많아질 것 같다, 라고. 하필 이 우주에서 하필 이 문명이 이 정도의 시점에 이르렀을 때, 운 좋게 살아남은 사피엔스 한 마리가 기록 하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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