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집필자가 긴 글을 쓰기 위해 최소한의 경제적 받침과 함께 물리적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공감이 된다. 분명 물리적 공간 분리는 현실의 육신의 한계를 지닌 우리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비용이나 주변 환경 같은 현실적 조건들도 무시할 수 없다. 더하여, '내가 원하는 여러 조건들에 부합하는 적당한 매물을 찾을 때까지 집필을 할 수 없다'는 자기 한계적 암시에 갇히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저렴한 비용으로 무한에 가까운 자유와 재량을 제공하는 온라인 공간. 그것은 방구석 추레한 나라도 이 세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고, 노력과 역량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고유의 매력으로 더욱 빛나고 확장될 독자적 세계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미래의 공간은, 보유한 자본 수준에 따라 현실과 가상의 영역으로 그 양극화가 분명해질거라는 유현준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2. 쓰기의 비저닝(Visioning)
꽃은 그의 이름으로 불렸을 때 특별함이 빛난다고 했다. 어느새 나의 특별한 취미는 사전적 의미를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빛을 잃었는지 모른다. 기존의 활동을 나열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그다음 그림을 구상하는 데에는 소홀해진 느낌이다. 사람들에게 설명했던 바로 그 글쓰기가 '해야 한다' 또는 '할 것이다'로 그치는 과정이 스스로에게 다소 피로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육신을 빌렸지만 정신 활동에 가까운 이 쓰기 행동은 더더욱 비저닝(Visioning)이 중요하다. 관념의 영역에서 기세를 잡고 개념을 확장하는 활동들에는 그에 맞는 에너지를 지닌 일종의 '선동'이 필요하다. 이 집필 행동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 이 고귀하고 신성한 활동의 시간을 어떻게 다시 재정의하고 구체화할 것인가. 2024년 나의 글쓰기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려내기를 계속하지 않으면 이는 2006년의 글쓰기와 어떻게 다를 것인가. 아니 어떻게 그보다 강렬하고 뜨거울 수 있을까.
2-1. 인물을 따라서
관념적인 주제 의식이나 메시지에 주목하기보다는 인물을 따라가 보는 것이 어떨까. 자꾸만 습관적으로 나오는 기획자적인 태도는 현상과 메시지를 자꾸 한 겹 두 겹 포장하고, 일반화된 하나의 주장으로 도출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래서 인물이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기보다는, 이 행동과 상황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글의 결말에 다다라서는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 묻게 되고, 심지어는 그 메시지의 '멋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그 이야기는 시작도 되지 못하고 그대로 피우지 못한 씨앗이 된다. 일단 인물을 따라가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사물을 응시하는데서 시작하자. 또 다른 인물을 만나고 어떤 대화를 하는지 엿듣자. 나에게 필요한 건 보고서가 아니라, 관찰일기다. 창작이라기보다는 오감의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이야기를 받아 적어 내려가는 회의록, 기록에 가깝다.
2-2. 디폴트 화자
인물을 따라간다는 말의 가장 디폴트 값은 나 자신을 따라가는 거다. 이건 특별한 상황 설정이 필요 없다는 점에서 그럴듯한 인트로를 꾸며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오늘 이 시간 이 장소의 나는 소설의 '그'와는 다르게 이미 대단히 구체화된 인물이다. 일단 가장 '기본빵'인 나에 기대어 쓰기로. 이렇게 하다 보면, 형식이나 목적 어떤 이상적 비전에 기대지 않고, 단순히 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또 물고 늘어지다 보면 그것은 어느새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하는 기대감.
2-3. 달라진 글쓰기 : 잃은 것과 얻은 것
법학이나 전략기획이라는 대단히 (High-level이라 적고 Blur Image로 이해한다) 추상적인 영역의 글쓰기를 많이 하다 보니, 나의 사고 회로는 물론 손가락마저도 그렇게 물든 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사사로운 이야기나 일상들을 적을 때, 퇴고를 엄격하게 하지 않는 글을 쓸 때 마치 손가락이 반센티만큼씩은 짧아지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어렸을 때 썼던 글들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럴듯한 제목을 적으려고 머리를 짜내지 않았고, 다 쓴 글을 퇴고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도 않았다. 그냥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이나 특정 인상에서 출발해서 그다음 연상되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털어놓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림을 붙이든, 그 내용의 결론이 시작과는 맞든 맞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 문단 별로 일관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주제에 벗어나거나 적절하지 않은 예시는 없는지, 무엇보다도 이 글을 볼 '독자'들을 신경스이게 만드는 부분은 없는지, 공격받거나 오해를 만들 부분은 없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 생각과 감정에만 집중하면 될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이후의 경험들이 내 글쓰기에 미친 영향들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편하게 쓰기, 자유롭게 생각하기, 비현실적이고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를 하기 등등의 영역들을 지워버렸다. 틀에 박히지 않은 글, 형식이나 당위에 갇히지 않은 글을 쓰는 나는 그렇게 점점 작아졌다. 대신에 좀 더 '어른스러운 글' 쓰기, 보편타당하고 객관성을 표방한 글쓰기, 심히 일탈적이거나 누군가를 자극하지 않는 글쓰기에 나는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나는 회사 월급에 대한 일부 채무를 탕감하기도 하고, 독서 모임이나 브런치 활동을 하며 그럴듯한 취미를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데에도 성공했다. 분명히 기존 글쓰기와는 다른 '타자화된 글쓰기'는 이 사적인 힐링 활동을 공식적인 역량이나 노동으로 인정받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나는 내 변화를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한다.
3. 쓰지 않는 강연자, 요리하지 않는 주방장
어떤 인사이트, 통찰은 직접 경험과 개념적 깨달음에 기반한 간접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 보통 이 둘은 동시 다발적으로 쌓여, 그 사람의 역량의 토대가 된다. 강연자는 그 무엇이든 그의 메시지 설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주방장도 손님에게 멋진 요리를 내놓기 위해 직접 고기를 다듬거나 야채를 씻지 않아도 된다. 그 강연자의 연설과 주방장의 지시, 관리감독 하에 좋은 작품을 내놓는 경우, 우리는 그 강연자나 주방장에게 기꺼이 감사를 표할 용의가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강연자와 주방장이 전혀 글을 쓰지 않거나 요리를 하지 않았다면 어떨까? 1,2년이 아니라 5년 10년 아예 직접적인 '작업 활동'이 없었다면 그의 감각은 충분히 날카롭고 예민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충분히 쓰고 다듬은 자만이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무엇이었더라도 경험에는 유통기한이 있고, 싱싱하지 않은 경험과 이야기들은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박물관에서는 빛이 날 기념비적인 무엇일지 몰라도 그것이 fresh 하진 않다는 데에는 동의하여야 한다. 특히 완결되지 않은 하나의 삶 전체로 볼 때,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선, 과거의 영광에 취하기보다는 자꾸만 채찍질하고 새로운 출발점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작품들이, 20-30년 전 히트곡을 들고 밤무대를 전전하는 한물 간 연예인의 노랫말 같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