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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Dec 10. 2023

글 쓰는 이유

글 쓰는 이유


지난 11월 30일, 우리 팀에서 주관한 국제회의를 마치고 뒤풀이를 했다. 치킨집에 모인 스무 명 중 절반은 외국인이었다. 나는 앉을 데부터 살폈다. 외국인으로 둘러 이면, 선웃음이나 지으면서 시간을 보낼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구석도 싫었다. 회의 주관 팀장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은 지키고 싶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한국인 세 명에 외국인 한 명, 가장 좋은 조합이다. 기분 좋게 생맥주 두 잔을 마셨더니, 혀는 살살 꼬부라지고, 얼굴은 불그스레 달아올랐다. 그때 앞자리에 앉은 리우 박사가 보였다.


그의 옆에는 영어가 나만큼 서툰 직원이 앉았다. 게다가 앞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아서 물로 목을 축이며, 미소만 띨 뿐이었다. 나는 그의 옆자리로 갔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부산에 있는 국제기구 사무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50대 중국인이며 사무국장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술 때문인지, 영어가 술술 나왔다. 그에게 나를 기억하냐고 물었더니, “물론이다.”라며 반가워했다. 그가 샀던 장어탕이 맛있었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부산에서 순천으로 오는 기차를 탔는데, 역마다 서는 바람에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술을 왜 안 마시냐고 묻자, 대학 때 친구들 때문에 독한 술을 몇 잔 마시고 병원에 실려 간 후로 냄새도 맡기 싫다고 했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지만, 지금도 아주 잘 좋아한다고 했더니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는 곧 케냐 나이로비에 있는 더 큰 국제기구로 간다고 했다. 우리는 20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후 그날 찍은 사진과 나이로비에 가도 나를 기억해 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그는 ‘확실히 기억할 것입니다. 특히, 당신의 유머와 웃음을.’이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 나이로비에 놀러 오라고 했다.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웃겼다면 내 영어가 통한 게 아닌가! 나는 답장을 보냈다. 나이로비에 가려면, 부산에서 순천 오는 기차를 열 번쯤 타는 노력이 필요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내 영어 실력은 간단한 소통만 가능한 수준이다. 지난 9월, 캐나다 밴쿠버의 스타벅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총회 발표 연습을 할 계획이었다. 커피를 주문하려는데, 종업원의 말이 너무 빨라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겨우 아메리카노만 주문했다. 커피를 받는 데로 가 보니 잔에 써진 이름을 불렀다. 종업원은 “커피가 준비되면 뭐라고 불러 주면 되겠냐.”라고 물은 거였는데, 방긋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눈치를 보며 5분쯤 기다렸다.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는 컵이 있다. 내 거였다. 오후에도 스타벅스에 들렀다.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영어를 잘 못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중국계로 보이는 종업원은 “문제없다, 뭐라고 불러줄까?”라며 물었다. “황(HWANG)”이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당당하게 “왕(WANG)”이 쓰여진 컵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그날의 커피는 쌉쌀하면서도 달짝지근했다.


그동안 내 자리는 영어를 잘하는 사무관들이 맡았다. 국내외 협력을 담당하기 때문에 외국인과 소통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작년부터는 제도 개선 업무가 추가됐다. 이 업무를 맡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바로 윗 상사에게 이 자리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외국에 나가는 건 좋았지만, 내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때는 늦었다. 국장님과 과장님은 다른 대안조차 준비해 놓지 않았다. 자평해 보자면 나에겐 부족한 영어를 채워줄 능력이 있었다. 바로 글쓰기다.


우리 직장에서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겠지만, 글쓰기를 오래 배우고 있는 사람은 적을 것 같다.  5년째 목포대학교 평생 교육원의 ‘일상의 글쓰기’ 과정에 다닌다. 이훈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매주 한 편씩 글을 쓴다. 언제나 힘든 일이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짜낸다. 그러면서 글 실력도 늘었다. 직원들로부터는 작가라는 호칭도 가끔 듣는다. 그럴 때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올해 국제회의에서 그룹의 의장으로 두 번 발표 자리에 섰다. 물론 한국어로 했다. 발표 원고를 준비할 때 수업을 들은 게 큰 도움이 됐다. 원고를 잘 쓰면 떨리는 것도 줄어든다. 나중에 직원에게 들으니, 통역도 잘 됐다고 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자, 박수가 터졌다. 청중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느껴졌다. 미국 대표는 발표를 마친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은 어느 누구보다 따뜻했다.


지난 11월, 여수에서 있었던 국제회의에서 진행을 맡았고, 발표도 했다. 어쩌면 마지막 무대다. 내년이면 4년 만에 목포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대중 앞에 서면 심장이 가파르게 뛰던 증세는 완전히 나았다. 오히려 즐긴다. 사실 나는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한다. 할 말을 미리 글로 풀어놓지 않으면 엉망이 된다. 말하듯이 쓰면, 듣는 사람은 내가 쓴 걸 말하는지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내용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것도 글을 쓰면서 쌓은 실력이다.


이번 회의는 구성도 좋았고, 내용도 알차다는 평가가 많았다. 국장님은 우리 팀원들을 국장실로 불렀다. 차를 따라 주시며 고생했다고, 격려했다. 국장님은 내 후임자를 누구로 정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국장님은 나 같은 사람을 추천해 보라고 했다.


내 글을 브런치에 올린다. 12월에 쓴 <딸의 사춘기>가 조회수가 4만 회를 넘었다는 알람이 울렸다. 포털 다음에 올라간 거였다. ‘홈&쿠킹’ 베스트 7에도 잠시 올라갔는데, 내 글을 빼고는 전부 신문기사였다. 어떤 방법으로 선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글이 인정받은 것 같아 아내에게 자랑부터 했다.


이 글은 이번 학기 마지막 과제다. 올해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글을 쓴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예전 글을 살펴보다가 2020년 9월에 쓴 <아들의 사춘기>를 다시 읽었다. 중학교 1학년 아들이 엄마와 심하게 다툰 일을 주제로 다. 글에는 인천으로 발령이 나서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어느새 아들은 고등학생이 됐다. 아들은 이번 기말고사에서 수학 전교 1등을 했다며 가족 단체 대화방에 자랑했다. 사진은 사람의 표정을 아름답게 남겨 놓지만, 글은 마음까지 담을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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