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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Dec 23. 2023

26년 전, 일본 소도시를 그리며

일본 출장, 도야마


1997년 11월 어느 날, 배는 일본 작은 항구 향했다. 나는 대학교 3학년, 승선 실습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일본 땅이 아른거렸다. 기지개를 켜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미소는 피었고, 가슴은 뛰었다. 내게 은 황금이 넘쳐나는 전설의 도시 엘도라도와 슷했다. 친구들 사이에선 일본에서 만든 워크맨 최고 인기였다. 닝일레븐과 같은 일본 게임을 자주 하고, 슬램덩크와 같은 일본 만화도 즐겨봤다. 상상만 하던 그 땅에 처음 서는 였다.


일본어를 조금 하던 기관장님을 따라 간이역에서 기차를 탔다. 창밖으로 목조 건물이 스쳐갔다. 숲의 운해와 어우러진 황금색 귤밭 보였다. 기차의 고요함을 깨는 건 승무원의 안내 방송이었다. 임에서 자주 듣던 일본어는 정겨웠다. 30분쯤 지나서 우체국과 상점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누군가는 편지를 부치고, 배에서 쓸 물건을 샀다. 할머니가 장사하는 노포에서 따뜻한 우동도 먹었다. 피로와 외로움을 떨치기에 충분했다. 일본을 마지막으로 10개월 간의 승선 실습은 막을 내렸다. 아쉽게도 마을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풍경과 감정은 아직 잔상으로 남다. 일본 소도시 매력에 푹 빠 이유다.


지난 11월 28일, 일본 출장이 잡혔다. 일 때문에 가는 건 실습 이후 26년 만이다. 일정은 3박 4일로 빠듯했다. 그래도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설렜다. 예상대로 두어 시간 겨우 선잠을 잤다. 여섯 시쯤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일곱 시 40분, 하네다행 비행기를 탔다. 기내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졸다 보니 한 시간 40분이 금세 지나갔다. 도쿄에서 하루 전에 도착한 일행을 만나 도심 공원을 걸었다. 신호등의 "삐옥삐옥" 보행 신호 알림음 일본 감성에 빠지게 한다. 진노란 잎을 반쯤 떨어뜨린 은행나무와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 사진에서나 보던 도쿄 타워가 어우러져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16시부터 한-일 정례 회의가 열렸다.  국이 주제 발표를 하고 의견을 나눴다. 발표 시간은 20분이 주어 졌다. 일본 진행자는 시간이 지나면 종을 치겠다고 했다. 나는 세 번째 순서였다. 순차 통역이어서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늘어졌다. 앞자리에 일본 과장님 표정이 좋지 않다. 안 되겠다 싶었다. 쉬는 시간에 발표 내용을 과감하게 쳐냈다. 준비한 동영상 양해를 구하고 틀지 않았다. 시간을 지야 하는 건 시험만이 아니다. 가끔 지정 시간을 훌쩍 넘기는 발표자가 있다. 자신의 지식을 공유하고 싶은 선한 의도겠지만, 청중과 주최 측에게 실례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청중은 예정된 시간이 지나면, 발표 내용보다는 시계에 더 관심을 둔다. 통역이 있는 회의에서는 통역사와 사전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다. 통역사가 공부할 수 있도록 스크립트나 발표 자료를 주면 좋다. 전문 분야일수록 더 그렇다. 통역사가 잘 전달해야 자신의 발표는 더욱 빛난다.


회의를 마치고 환영 만찬을 열었다. 탁자가 다섯 개쯤 있는 작은 식당에 모였다. 정갈한 회 코스 요리가 차려졌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카사이는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었다. 우리는 캐나다에서 열린 두 번의 회의에서 같은 그룹이었다. 그와 어깨동무를 하며 사진을 찍었다. 광활한 우주의 창백한 푸른 점 지구에서 세 번이나 만났으니 보통 인연은 아니다. 무뚝뚝 보이던 일본 과장님도 이야기를 나눠 보니 소탈했다. 술은 못 마셨지만, 분위기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나는 건배사를 다. 일본에 오니 참 따뜻하다고 했다. 먼저 날씨가 한국보다 따뜻하고, 두 번 째는 카사이를 비롯한 직원들의 미소가 따뜻하고, 마지막으로 일본 과장님의 마음이 따뜻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건배사로 '생큐', '안녕', '곰방와'를 제안했다. 우리는 다 함께 '곰방와'를 외쳤다.


다음 날, 어둠이 가실 무렵 호텔을 나섰다. 목적지는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황거다. 어제 10층 회의실에서 내려다봤는데, 규모가 상당했다. 이렇게라도 시간을 내지 않으면 영영 못 올 것 같았다. 황거는 둘레가 4km에 달한다. 아침 일찍 마라톤 하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가 반 시계 방향으로 뛰었다. 서로 부딪지 않으려고 만든 규칙이라고 했다. 아침 12km를 걸었다고 하니 직원들 깜짝 놀랐다. 해외에 나오면 자는 시간 아다. 잠은 한국에서 자 되기 때문이다. 둘째 날 일정으로 요코하마의 현장 대응 기관의 관계자를 만나고, 시설을 둘러봤다. 국가 간의 협력과 연대는 재난 대응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소다. 이번 회의를 통해 우리는 양국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날은 일본의 소도시 야마 국제기구 관계자와 회의가 잡. 도야마는 국제회의가 많이 열리는 관광 도시로 일본 정부에서 선정한 환경 모델 도시라고 한다. 인구는 40만쯤 된다. 한국 관광객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데였다. 튜브에도 정보가 많이 없었다. 는 이곳의 정보를 찾으며 실습 때 그곳을 떠올렸다. 혹시나 비슷한 풍경이라도 보면 좋을 것 같았다.


하네다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창밖으로 보이는 설산과 풍경이 장관이다. 창쪽 자리가 왜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창쪽 할아버지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꼭 이럴 때 스마트폰 카메라는 타이머가 작동한다. 그것도 10초. 할아버지도 나도 민망하긴 마찬가지다. 한 시간의 짧은 비행을 마치고, 도야마 공항에 착륙했다. 우리 비행기 승객밖에 없다. 수속을 하고, 짐을 찾는 것도 금방다. 공항버스를 타고 도야마 시내로 갔다. 바깥 풍경이 정겹다. 시골 출신이라 자연을 좋아한다. 논과 시골 주택이 어우러진 게 고즈넉다.


도야마역에서 내렸다. 도야마의 명물인 트랩 여러 대가 오간다. 멀리 눈이 쌓인 다테야마 산(3015m)이 보인다. 날씨는 선선하고, 공기는 상쾌했다. 직원 모두가 스마트폰 들고 여기저기 찍어 다. 감탄사는 몇 분간 계속됐다. 점심은 일본식 회덮밥인 카이센동을 먹었다. 일본은 어느 식당에 가도 기본 이상은 한다. 나오면서 주방장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오이시(맛있어요.)"라고 말했다. 주방장은 웃으며 "아리가도 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서로에게 완벽한 식사였다.


두 시부터 시작한 국제기구 관계자 회의는 네 시가 돼서야 끝났다. 날이 흐려서인지,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눠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분위기를 보니 젊은 사람들끼리 다니고 싶은 눈치였다. 젊은 이들은 도야마의 명소인 스타벅스에 간다고 했다. 나는 과장님과 팀을 이뤘다. 우리는 다테야마 산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데까지 가 보자고 했다. 도야마에서는 호텔에서 외국인에게 주는 무료 트랩 탑승권 두 장을 받을 수 있다. 일본어를 잘하는 과장님까지 있으니 든든했다. 과장님이 알아낸 정보로 트랩을 탔다. 과장님은 왜 그런지 지도를 보며 설명했다. 트랩이 천천히 움직인다. 목적지와도 점점 멀어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다. 종점인 도야마 대학을 둘러보기로 했다.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 대학생들을 보니 젊음이 느껴졌다. 26년 전에는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돌아오면서 도야마성과 시청에 있는 전망대를 둘러봤지만 뭔가 아쉬웠다. 과장님과 내일 새벽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여섯 시쯤 눈이 떠졌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서너 시간뿐이다. 바깥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과장님은 피곤해서 도저히 못 움직이겠다고 했다. 호텔 로비에 우산을 빌리고, 도야마역으로 갔다. 미리 봐둔 경전철을 탔다. 경전철은 중학생으로 붐볐다. 몇몇은 스마트폰을 보고, 몇몇은 공부를 했다. 마스크를 쓴 한 여자 아이는 눈매가 가늘고 머리를 묶은 게 우리 딸과 많이 닮았다. 어딜 가나 사는 건 다 비슷한 것 같다. 전철은 도심을 통과해 작은 마을을 사이를 지나갔다. 일본의 전통 주택도 하나둘 씩 보였다. 정원수로 기르는 귤나무에는 짙노란 귤이 주렁주렁 달렸다. 30분쯤 지나서 목적지인 게이린조마에역이 나왔다.


게이린조마에역은 시골 마을에 있는 간이역이다. 도야마 안내 지도에는 반나절쯤 시간을 내서 일본의 옛 도시를 느껴보라고 쓰여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금 큰 면 단위 마을 같았다. 전통 주택이 많았고, 노포와 사찰도 있었다. 우산을 쓰고 가는 네 명의 여자 아이들이 귀여워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시간을 계속 확인하며, 종종걸음으로 이곳저곳 살폈다. 한편으로는 비행시간에 늦으면 안 돼서 불안했다. 시간이 야속했다. 비행기 시간을 한두 시간 미룰 수 있다면 얼마쯤은 쓸 수 있을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야마로 오는 경전철을 탔다. 우리는 도야마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번 출장을 마무리했다. 한국바깥공기는 4일 전보다 훨씬 쌀쌀다.  


내년 1월이면 가족이 있는 목포로 발령이 날 것 같다. 이번 회의가 본청에서의 마지막 해외 출장이다. 어쩌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4년 간의 본청 생활은 때론 힘들고, 외로웠다. 승진하고 해외 출장도 여러 번 다녀왔으니 충분히 보상도 받았다.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계속 글을 쓴 것도 칭찬할 만하다. 26년 전 일본의 그 마을을 이번에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 여행은 항상 기대된다.    

좌) 일본 도쿄의 공원, 우) 도야마의 스타벅스
도야마에서 본 다테야산
도야마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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