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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희 Apr 17. 2019

우리가 사랑했던 대기업의 유년시절

대기업이 놓치고 있는 것

국민들이 대기업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다. 70~80년대 대기업은 혁신 기업이면서 신뢰받는 대상이었다.


판매망이 마땅치 않던 그 시절 중소기업 제품은 주로 동네 양판점이나 시장, 지하철, 고속버스, 노점 등에서 팔렸다. 중소기업이 직접 판매망을 운영하지 않는데다 가격 정보가 잘 유통되지 않다보니 가격이 제각기였다. 따라서 소비자는 '눈탱이' 맞기가 쉽상이었다. 게다가 제품 품질도 신통치 않았다. 제품이 고장이라도 나면 동네 사설 AS 센터에 가야 하는데 수리비용이 적정한지, 제대로된 부품을 썼는지 알수가 없어 골치가 아팠다.

여러모로 중소기업 제품에는 불안감을 동반하였다.


그에 반해 대기업 제품은 품질은 믿을만 했고 가격도 투명하였다. 표준화된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품질이 균일하였다. 또한 직영 대리점을 통해 판매하니 소비자는 가격을 속을 걱정이 없었다. 전국 곳곳에 직영 A/S 센터가 있어 고장 걱정도 적었다. 그만큼 대기업은 제조, 판매에서 A/S까지 중소기업 과 차별성이 있었고 소비자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게다가 당시는 '국산품 애용', '신토불이' 등의 온갖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가 통용되던 시절로 대기업 물건을 사는 것은 곧 국익에 기여하는 행위였다. 그만큼 소비자는 구매 행위의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다. 기술적 측면에서 세계 최초는 아닐지라도 국내 최초는 대부분 대기업 차지였었던 만큼 'early adopter'로써의 만족감도 주었다. 여러 면에서 대기업은 즐거운 소비자 경험을 제공하는 기업이었다.


최초는 언제나 대기업의 것이었다. 명성이 자자했던 (금성 TV가 아닌) 삼성 TV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정신은 '겨레사랑 나라사랑'의 민족주의적 소비에서 '가성비'나 '가심비' 등의 개인의 합리적인 소비를 중시하는 시대로 변했다. 중소기업도 이제는 예전과 다르게 믿을만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대기업은 더이상 혁신 기업이 아닌 교모한 마케팅 전략으로 기술 과시를 위한 오버스펙 제품을 비싸게 파는 기업의 이미지로 전락하였다.


왜일까? 과거와 대기업과 지금의 대기업은 무엇이 달라진걸까?


사실 대기업이 변한 건 없다. 변한 건 오히려 시대정신이고 소비자다. 산업개발 시대에 대기업이란 외국기업에 맞서서 믿을 만한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던 산업 파수꾼이었다. 선진국에서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던 자동차, 반도체, TV, 조선, 고층 건물을 국내 기업이 직접 만들어 내는 장면에서 국민은 자부심을 느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국산차, 포니


그런 공감 하에 국민들은 국가경제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대기업의 부정적인 행태들(편법적인 기업 승계, 일감 몰아주기, 협력업체 쥐어짜기 등)을 묵인해 주었다. 하지만 국가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시대정신이 변하고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직장과 개인의 일체감이 약화되자 국산품 애용의 논리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대기업의 이익이 국익에는 기여할지 모르지만 개인의 행복에는 기여하지 못하는 마당에 대기업의 편법적인 행위을 묵과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IMF로 인한 가계경제의 붕괴가 시대의식의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된다)


제품의 국적보다는 제품이 제공하는 가치와 진정성에 더 높은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에 스타트업은 이 부분을 파고 들었다. 기존 대기업이 복잡한 의사결정 체계와 내외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 제품의 본질 가치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거대화된 여느 조직처럼 대기업은 '보여주기식'의 성과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마케팅을 하고 과도하게 제품 기능을 개발한다. 평가자는 매년 작년과 다른 새로운 것을 요구하였고 그럴수록 개별 조직은 각자의 KPI 달성을 위해 불필요한(혹은 Marginal한 가치를 제공하는) 업무들을 추진하였다. 그만큼 소비자의 불만족과 경계심은 비례하여 커져간다. 결국 모든 조직이 KPI 달성를 달성했음에도 소비자 만족도는 오히려 퇴보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새로운걸 하면 성과니까....올해는 네모 바퀴다.


그에 반해 스타트업은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였다. 이는 legacy가 없어 스타트업의 업무 프로세스가 단순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인적/물적 리소스가 제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유가 어찌됐든 간에 스타트업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본질 가치 제고에 매진하여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몇가지 사례를 보자.


신선제품 유통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마켓컬리는 '신선도 관리'라는 핵심 가치에 집중했다. 신선도 유지를 위해 Full 콜드체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새벽배송을 도입하기위해 재무실적 적자도 불사하였다. 거기에다 엘리트 직장인이었던 주부(김슬아 대표, 골드만삭스와 테마섹 근무)가 매일 장보기가 힘들어 아예 직접 회사를 차렸다는 식의 창업 스토리는 회사의 진정성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물론 마케팅 차원의 부풀려진 창업 스토리일 수도 있다)


'옥토끼 프로젝트'(회사이름이자 프로젝트 이름) 사례도 흥미롭다. E-커머스 대표, 디자이너, 요식업 종사자 등 각 분야에서 일하던 6인이 미식과 경영 스터디를 하던 중에 식문화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의기투합하였다. 첫 작품으로 라면을 정하였고 '세상에 없는 라면 만들기'라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렇게 만든게 일명 '요괴라면'이다. 이 독특한 이름의 라면(봉골레라면, 국물떡볶이맛 라면 등)은 '18년 40만개 정도가 팔렸다.


요괴라면의 판매 숫자보다 중요한건 그들이 제시한 '세상에 없는 라면'이라는 가치와 스토리가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간 4.5억개 팔리는 신라면의 네이버 월 검색량이 3.3만건에 불과한데 반해 요괴라면의 검색량이 월 1.6만건) 아마 대기업에서는 복잡한 프로세스와 legacy로 '요괴라면'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Risk 경감이라는 미명하에 여러부서의 '도움이라는 간섭'을 받다보면 프로젝트가 당초에 목표로 했던 가치가 상당히 희석되었을 거다.


옥토끼프로젝트 1호매장. '감성형 편의점'이라 부르고 '인스타용 매장'이라 쓴다.


우리가 스타트업을 사랑하는 이유


소비자가 제품을 사는 이유는 명확하다. 제품이 지불한 현금 이상의 가치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구조의 독과점화나 가치 사슬 참여자의 힘의 불균형으로 제품의 생산/판매 구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할 때 제품 퀄러티는 떨어진다. 그리고 소비자는 제품이 제공하는 가치 이상의 현금을 지불하게 된다. 소비자는 제품에 불만을 느끼고 기업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한때 국민이 사랑했던 대기업은 거대화될수록 산업을 독과점화하고 가치사슬을 황폐화하여 소비자의 신뢰를 잃었다. 대기업은 현란한 광고와 기술 과시로 소비자를 현혹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소비자는 '장삿속'을 경계하고 구매를 주저한다. 동일선상에서 우리는 반대의 이유로 스타트업을 사랑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광고가 현란하지도, 기술적으로 뛰어나지도 않을지라도 스타트업의 진정성을 믿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회사의 진정성을 신뢰하는지는 제품이 다양해지고 정보가 넘처날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합리적인 소비 탐색 행위가 제한될수록 소비자는 기업 이미지와 제품의 평판에 의존하는 소비행위를 한다. 애플의 '애플빠', 샤오미의 '미팬' 존재하는 이유다. 이들 팬덤은 해당 기업의 가치에 동조하고 진정성을 신뢰하기에 제품의 성능을 비교하고 고르기보다는 그들의 제품을 지속적으로 구매한다.


 스타트업은 위기는 진정성이 의심받을때 발생한다. 배달의 민족이 제공했던 가치(음식 주문의 불편함과 매장 평가의 정보비대칭 해소)는 가맹점주의 과도한 수수료 부담이 이슈가 되면서 훼손되었다. 스타트업임에도 사업 행태가 기존 대기업과 다를바 없어 보였던 것이다. 결국 배달의 민족은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했던 결제 수수료매출을 포기하면서 이슈를 겨우 일단락 시킬수 있었다. 그리고 더이상 우리가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마켓컬리와 옥토끼프로젝트는 비전문가가 만든 상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오히려 비전문가였기에 그들의 진정성이 소비자에게 어필했다. 비전문가가 소비자의 마음으로 꼼꼼히 만들었을 거라는 기대는 경계심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러므로 스타트업은 진정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구글이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이 될수 있었던 건 (지금은 사라지긴 했지만) 'Don't be evil'의 정신을 끝까지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가 스타트업을 사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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