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소화불량이 생겼다. 아이를 재우려고 저녁식사가 채 소화되기도 전에 침대에 눕다 보니 생긴 일종의 육아병이다. 지금은 비록 소화불량에 고생하지만 사실 내 배는 튼튼하기로 유명했다.
대학교 때 일이다. 같이 자취하는 룸메이트와 방에서 썩은 바나나를 나눠 먹었다. 일부러 먹은 것은 아니고 그저 주머니의 궁함과 둔감한 미각 탓에 바나나가 썩은지도 모르고 주어 먹은 것뿐이었다. 아무튼 그 일로 친구의 배는 사달이 났다. 식중독인지 장염인지 며칠을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며 친구는 똥기계가 되어 갔다. 그러나 같은 바나나를 먹은 내 배는 똥기계를 비웃듯 시종일관 평온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때는 치킨과 맥주, 피자, 탕수육, 라면의 야식을 매일 먹던 시절이었다. 내일의 더부룩함 따위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야식을 많이 먹더라도 배탈이 나지 않았다. 좀비 마냥 밀려오는 음식물도 일단 배에 들어가면 단 몇 시간 만에 말끔히 정리되었다. 그 덕에 비록 엥겔지수는 높았을지라도 소화불량으로 고생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소화불량에 걸린 것이다. 그것도 과거가 무색할 만큼 만성으로 말이다.
소화불량의 직접적인 원인은 위산과다다. 과식이나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한 위산 과다분비가 위내벽을 자극하고 식도로 역류하면서 생긴다. 나의 경우는 밥 먹고 곧바로 눕기를 반복했으니 과식보다는 주로 잘못된 식습관 탓이다.
다만 나의 경우는 매몰차게 늙어가는 나이도 소화불량의 한 원인이다. 썩은 바나나도 소화시키던 그때에 비해 기초대사 레벨이 많이 낮아졌다. 같이 밥 먹고 누운 내 아이의 '신상' 위장은 멀쩡한데 내 '중고' 위장만 쓰린 걸로 보면 나이의 영향을 체감한다.
어찌 됐든 제산제를 먹고 식습관을 개선하면 증상이 호전된다 한다. 다만 이때 주의할 점이 있다.
소화불량의 원인이 위산과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다. 위산이 부족해도 음식물이 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 속 쓰림이 생길 수 있다. 이 경우 제산제는 위산을 중화시켜 오히려 증상이 악화시킨다.
몰랐다. 그저 소화불량이니 위산과다일 거라 단언해버렸다. 보이는 증상이 같더라도 원인이 다를 수 있다. 그저 익숙한 증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원인을 지레짐작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대게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원인을 별생각 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흔히 반복되어 익숙한 것에는 습관화된 반응을 보이고 결론을 예단한다. 그건 중력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삶은 동일한 것이 적다. 같아 보여도 맥락과 시점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별 고민 없이 같다고 결론 내버린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익숙함이 '생각'를 막아버린다.
익숙함을 깨고자하는 예술사조. 일명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 친숙한 일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함
삶은 대부분 익숙함의 반복이다. 회사원이라면 기상-출근-회사-퇴근-취침이 반복된다. 일상이 모여 삶이 되고 우리 뇌는 '익숙함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 뇌는 매너리즘에 젖어 감각은 무뎌지며 고정관념을 만든다. 그러나 만일 매일 걷는 출퇴근길 풍경이 달라 보인다면?
출근길 풍경이 달라지면 기분이 달라지고 일상이 평소와 달라질 거다. 만약 이러한 작은 변화가 누적된다면 기울어진 직선운동의 증폭처럼 삶이 바꿀지도 모른다.
매일 출근하는 거리의 풍경은 사실 단 하루도 같지 않고 나의 하루도 어제와는 다른 하루이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지나친 업무나 대화에 사실은 대단한 사건이나 스토리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