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까뮈, 부조리한 세계
한국사회에서 가장 재밌을 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20대 초반 일 것이다. 20대 때는 그야말로 해방감과 자유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유후!) 사회에서 금지했던 대부분의 제한은 20살을 알리는 12시가 땡 하는 순간 무효로 돌아간다. 필자는 술, 담배를 고등학생 때 맛보지 않았고 pc방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터라 별 해방감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냥 성인이 되었다는 느낌 그리고 "아 이제 너도 20살이구나"라는 당연한 인정들은 생각보다 나쁜 기분이 아니었던 것 같다.
20대가 재밌는 이유는 20대의 주된 키워드는 "연애"이기 때문이다. 연애란 무엇일까? dna의 꿈은 영원히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영존시킬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자기를 품은 생명 개체가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크다. 따라서 dna는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 방법은 바로 개체들이 자신을(dna) 담은 개체들을 계속해서 낳게 하는 것이다. 즉 영원히 control c + control v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부조리함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이 dna는 결국 더 우월한 자신의 복제본을 남기기를 원하기에 더 우월한 개체를 찾는다. 대학 안에서 너무나 예뻤던 그토록 상냥해서 반해버린 우리들의 첫사랑들은 주로 키 크고 훤칠했던 선배들과 짝이 되었다. (내 이야기 정말 아니다!, 믿어달라!)
이렇게 20대 때는 첫사랑으로 인한 잔혹함과 부조리함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이것은 썩 나쁘지 않은 추억으로 끝나기 때문에 나중에 술자리에서 얘기하기에 참 재밌는 소재가 된다.
(필자는 당하지 않았다. 정말이다!)
까뮈는 세상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부조리함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서 피어오른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예뻤던 첫사랑이 선배를 택한 것이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느꼈던 절망감과 상처가 부조리함인 것이다. 이만큼 했으니 저 누나도 나를 좋아해 주겠지 라는 믿음이 배신당한 순간 부조리함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얻는 진리 중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바라든지 세상은 그것을 쉽게 쥐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간절함의 깊이를 조롱하는 것 마냥, 우리의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깊어진다.
그럼 애도 불구하고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삶의 의미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이 의미 있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마땅히 의미와 가치를 띄며 남들에게 인정받을만한 삶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모순적인 것은 우리가 그토록 잘 산다고 해도, 수많은 가치와 업적을 살면서 쌓아 올리다고 해도 우리는 죽는다. 백 년 가까이 살다가 없어질 유기체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전전긍긍하며 쌓아 올린 것들은 언젠간 무너지고 잊힌다. 죽음이라는 것, 나의 인생과 삶이 끝나고 잊히는 것, 이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어찌 보면 우리의 합리와 도덕에 반하는 것과 같기도 한 것 같다.
우리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도 우리의 존재가 계속될 수 있으리라는, 우리가 쌓아 올린 가치들은 계속 의미 있을 것이라는 우리 기준에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죽음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
즉 까뮈에게 부조리함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가졌던,
합리적이었던 생각과 믿음이 실제와는 다를 때,
실제 세상은 우리의 믿음과 아무런 관련 없는 세상인 것을 체감할 때 피어오른다.
이렇게 부조리함을 마주한 인간은 삶의 의미 또한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사르트르는 절대적인 삶의 지침이나 가치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우리에게는 선택할 자유만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 이러한 부조리함 앞에서 "나는 반드시 죽고 나의 존재는 망각된다"라는 잔혹함 앞에서 절망감을 느낀다.
까뮈에 따르면
인간은 이렇게 부조리함으로 인해 느껴지는 절망감에 대하여 3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1. 자살
2. 희망
3. 저항
첫 번째부터 살펴보자
시지프 신화 첫 번째 말투에서 까뮈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적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은 다음의 문제이다."
인생이 우리가 느끼는 부조리함으로 인해 가치를 잃으면 자살은 제법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까뮈는 이 선택지는 비겁하다고 여긴다. 모든 인간은 필히 삶에 대해서 부조리함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자살은 그런 부조리함에 맞서 보거나 수용해 보는 것이 아닌 비겁하게 피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희망이다.
희망은 부조리함을 어떤 다른 존재나 방법을 통해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가령 대표적으로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에 대하여 영생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우리는 없어지거나 망각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될 수 있다. 즉 부조리함에 벗어날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까뮈에 따르면 이러한 희망은 인간이 부조리함을 벗어나기 위해 만든 메커니즘 그 이상, 이하로도 보고 있지 않다. 또한 이 방법은 선대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르의 방법이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느끼는 부조리한 감정을 신과의 독대를 통해, 신과의 일대일 만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저항이다.
저항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시지프 신화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시지프라는 인간은 불을 인간에게 넘겨주고 신들을 기만한 죄로 평생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문제는 산꼭대기에 바위를 올리자마자 바위는 무조건 다시 절벽밑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시지프는 그리고 계속 그 바위를 들어 올려 꼭대기로 향해야 한다. 즉 부조리함 그 자체의 과정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카뮈가 말하는 저항은 바위를 들어 올리는 것 자체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부조리함 과정 속에서도 살아있는 순간을 자랑스러워하며 꿋꿋이 버티는 것이다. 이것이 저항이다.
즉 삶이 부조리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존재하고 싶으나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절망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 자체에 자부심과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가겠노라고 외치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정신과도 관련이 크다. 까뮈는 우리는 타자가 겪는 어려움과 아픔에 대해서도 함께 저항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까뮈는 사람들이 삶의 잔혹함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어려움들,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함께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20대 첫사랑으로부터 시작하는 부조리함의 감정은 내가 소멸되기 직전까지 우리를 떠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뮈는 살아있는 이 순간에 자부심을 느끼며 당당하게 삶의 잔혹함에 저항해 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