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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Oct 16. 2019

가면과 얼굴, 존재와 기억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브이 포 벤데타를 다시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냥 볼만한 영화였는데 지금 보니 생각할만한 내용이 많더군요. 그래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브이 포 벤데타 포스터. 출처 : 다음영화 (개인적으로 한국판 포스터보다 이 포스터가 마음에 듭니다.)

저는 원작 코믹스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코믹스에 관련된 내용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어디까지나 이 영화가 별개의 텍스트라는 전제하에 쓰여진 글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혁명성이나 1984년적인 요소들은 이미 많은 평론가들과 리뷰어들이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쪽보다는 여기서 나타나는 상징성에 대해서 논하고 싶습니다. 만약 혁명성에 대해서 쓴 글을 원하시면 다른 분들의 글을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V라는 인물은 사실 굉장히 특이합니다. 가면을 썼고, 영화 내내 단 한번도 본래의 얼굴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V는 이러한 특이한 인물이기 때문에 평범합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사람이 대화를 할 때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얼굴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타인과의 변별성을 구분해주는 기호이며, 기호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 40이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은 인생을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얼굴은 타인과의 변별성, 그 사람의 인생 등을 담고 있는 그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그런 정체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정체성이 없다는 뜻이며, 결국 V는 아무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무도 아니다는 아무도 아니기 때문에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V는 자신의 정체성에 무정부주의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의 정체성을 빌려 씁니다.(V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씁니다.) 이렇게 V는 가이 포크스의 정체성을 빌려쓰면서 V의 얼굴은 기호를 기호화하는 기호가 됩니다. 이렇게 V의 얼굴은 모두의 얼굴이 됩니다. 이 과정은 마치 만화와 흡사합니다.


카툰화를 거친 얼굴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의 얼굴로 인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모든 것에 자신을 투영하고, 정체성과 감정을 부여하고 결국에는 세계를 자기 방식에 다라서 재구 성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사실적이고 정묘한 묘사가 사라진 카툰화된 캐릭터에 독자 자신을 투영한다
-스콧 맥클라우드, 김낙호 역, 만화의 이해, 비즈앤비즈, 2012,pp.39~44.


가면을 쓴 V의 얼굴은 모두의 얼굴이 됩니다. 그렇다면 V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요? V라는 인물은 V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V는 본래 정부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던 실험의 피실험자입니다. 그는 자기가 누군지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이 역사이며, 가문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이 족보이듯이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을 증명합니다. 이를테면 얼굴이 기호라면 기억은 기호를 채우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V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V의 존재는 누구도 될 수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두가 됩니다. V는 가이 포크스의 얼굴을 빌렸듯이 그의 존재도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11월 5일을



11월 5일은 400년전 가이 피어스가 화약음모사건을 일으켰던 날이며, 20년전 수용소가 불탄 날이며, 1년 뒤 의사당을 터트릴 날입니다. 이게 V가 가진 기억이며 V의 존재입니다. 즉, V의 존재는 정부와 종교의 탄압과 저항입니다. 이 V의 존재는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기호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탄압과 저항은 400년 전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겠지만 저항이 승리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빌린 기억과 얼굴은 모든 사람의 기억과 얼굴이 됩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제 아버지였어요. 또 어머니였고요, 동생이었고, 친구였으며 당신이자 저였어요. 우리 모두였죠.


누구였냐는 물음의 이비의 이 대답은 V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관통합니다. 탄압받았지만 결국 저항해내는 모두가 V의 정체입니다.




V로 대변되는 모두를 탄압하는 주체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서틀러 의장 연설 스틸컷. 출처 : 다음영화

위 스틸컷은 서틀러 의장의 연설 장면입니다. 서틀러 의장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의 빅브라더 같은 캐릭터입니다. 위 사진을 보시면 느껴지시겠지만 마치 나치의 히틀러를 연상시킵니다. 붉은 색과 검은 색의 대비와 서틀러 의장 옆에 있는 군복을 입고 있는 프로더로 등으로 인해서 전체주의의 대명사인 나치를 연상하게 합니다. 즉, 정부의 탄압입니다. 

제가 신경이 쓰였던 것은 저 샌들러 의장 뒤 벽면과 연설대에 붙어있는 상징이었습니다. 

(좌) 로젠 십자가, (우) 종주교 십자가. 출처 : 위키백과

저는 이게 십자가 상징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장 흡사한 십자가 상징을 찾아봤습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재밌게도 로렌 십자는 자유 프랑스의 상징이며, 잔 다르크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종교적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로렌 십자가를 1750~1810년에 원주민들을 개종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벨라루스에서 이러한 이중 십자가는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동방-비잔틴과 서양-라틴 교회의 전통을 결합한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제가 영어는 자신없기 때문에 정확히 아시고 싶으신 분은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Cross_of_Lorraine

중요한 것은 저 상징으로 인해 서틀러 의장의 정치체제는 정치 뿐만 아니라 종교까지 포함하게 됩니다. 프로더로는 방송에서 미국이 과거에 비해 힘을 잃었고 그 이유가 미국의 불경으로 인해 신의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V로 대변되는 일반 대중들을 향한 탄압에는 정치 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제까지 포함되게 된 것입니다.



클라이막스에서 대중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모두 V가 됩니다. 이때 가면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기능적 의미로 익명성으로 하여금 개인이 정부의 보복을 피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면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면서 V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공유합니다. V는 정부와 종교에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입니다. 개인의 정체성을 지우고 공유된 V의 정체성은 수만큼의 힘을 가지게 됩니다. 2016~17년에 있었던 촛불집회를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다음 영화
2016년 촛불집회 사진. 출처 :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14182

이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여기 개인의 정체성은 없습니다. 여기 있는 것은 촛불입니다. 개인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지우고 촛불로 대변되는 가치를 공유하며, 모인 국민의 수만큼의 힘을 가지게 됩니다.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이게 공유되어 군체가 되어 가지는 힘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보다는 이후 의사당이 터지고 난 이후가 더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습니다. 이것은 개인들이 정체성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V가 의사당의 마지막과 함께하였습니다. 그리고 탄압받던 개인들은 V의 정체성을 빌려쓰고 모였다가 승리하고 V의 정체성을 벗고 다시 개인으로 돌아갑니다. 이 장면이 저는 굉장히 기억에 남습니다.



아무래도 영화 자체가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관련 내용에 대해서도 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영화는 2005년도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그런데 당시보다도 지금 이 시대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에 본다면 다시 그때의 시대상을 비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겠지요. 예전에 보셨다면 지금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보시기를 추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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