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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성 Mar 23. 2022

가사는 없다


겨울 파도는 빠지지도 않았으면서 차갑다고 믿는다. 엘이 그랬듯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도 차갑다고 믿었듯이, 나도, 그렇게, 너 역시도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고, 나는 믿었다.


대체로 엘의 집에서 꺼내온 것은 나무젓가락 몇 개와 선풍기 하나였다. 엘은 사람들을 초대해 옥상에서 고기를 자주 구워먹었다. 나는 배달음식을 시키고 남은 나무젓가락과 굳이 여름인데 꼭 옥상에서 먹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맘을 들고 갔다. 그들은 웃었다. 엘은 박수치며 웃었다. 짝짝, 박수 소리가 너무 커. 이웃들이 한 소리 하겠어. 엘은 상관 없다는 듯이 박수를 계속 쳤다. 술병이 쓰러져도 엘은 쓰러지지 않고 박수를 쳤다. 짝짝. 


바다가 보이는 옥상에서 우리는 서로의 작업을 존중하면서 지냈다. 엘은 그림을 그렸고, 나는 작곡을 했다. 아무래도 이번 곡 커버 앨범은 네가 해줬으면 해. 얼마 줄 건데. 얼마가 필요한데, 근데 우리 통장 같지 않니. 같은 통장을 쓰는데, 굳이. 그럼 이번 달은 내가 조금 더 쓰는 걸로 하자. 라고, 엘은 말했고


나는 곡을 만들었지만 항상 가사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몇 자 쓰다가 말았다. 나는 엘에게, 그림은 편하겠어. 라고 함부로 말했다가 혼도 났다. 

야, 음악이라는 백지 위에 가사를 쓰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니. 나는 그냥 백지 위에 물감이나 얹고 사는데, 너는 좀 다르잖아. 


기타를 치다가 엘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멋진 일이라고, 곡을 쓰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곡을 쓰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곡을 쓰는 건, 뭔가, 그냥 흥얼거리는 음에다가 잉크를 붓는 느낌. 이랄까. 코드와 악보와 그 위에 뭔가를 끄적이면,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못 알아볼 것은 아닌 어떤 기호들이 생기는데, 이게 멋져? 연주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러자 엘은 나를 큰 캔버스 앞에 데려다 놓고 1시간 동안 흰 캔버스를 보라고 했다. 보면서, 뭘까. 뭐를 그려야 하지. 엘이 느끼는 공허함 앞에서, 나는 딱히 할말이 없었지만. 엘에게, 바다가 좋겠어. 라고 했다. 응? 바다. 바다인데 파도도 있는데, 눈도 내리고 하는데, 발자국이 있는거지. 


엘은, 그거 좋네. 

그리고 작업을 시작했고 또 사람들을 불러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엘은 작업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 작업을 마치지 못했기에 있었다가, 통장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 엘에게 연락을 했다.


통장이 그대로야.

응 그대로야.

왜 안썼어?

영감만 썼어.

응?

이제 연락하지마.


그런 말을 남기고 엘은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서로가 받을 건 다 끝난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고.


겨울 바다 앞에서 나는 대체로 엘에 대한 생각을 했다.

노래를 불렀으나,

가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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