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
결혼은 했지만 기존 관습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로운 연애를 하는 계약결혼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의 최고봉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는 '존재와 무', '구토' 등 시대의 명저를 남겼습니다.
프랑스 페미니즘의 원류이자 천재 여성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1908~1986)'
현재까지도 그녀의 저서 '제2의 성'은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서로 사랑하지만, 함께 살지는 않고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사랑하고 연인이 될 수 있는 '자유로움'과 다른 사람과 사랑할 때는 솔직하게 상대에게 이야기하고 숨기지 않는다는 '투명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1930년대 사회상으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이들의 파격적 행보는 1929년 계약결혼을 한 뒤, 사르트르가 죽는 1980년까지 50년 이상 지속됩니다.
그들의 철학과 가치관이 비슷했기에 사회통념을 뛰어넘는 계약결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은 인간은 가정이나 종교, 타인이나 사회같은 외부요인에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야 인간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해방의 선구자인 보부아르는 여성은 기존의 사회 관습인 결혼에 얽메여 결혼을 함과 동시에 기존 사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가정에 스스로 매몰된다고 주장하였죠.
여성의 역할이 육아나 가정살림에 한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파격적인 계약연애를 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각자 다른 연인이 있고, 다른 연애를 하더라도 서로의 삶에 대해 일체 관여하지 않았고, 사회와 타인이 그들의 삶을 비난해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키가 160cm밖에 되지 않았고 사팔뜨기 외모를 가진 사르트르는 여성에 대한 편력이 강했습니다.
그에 반해 날씬한 몸매에 지성미를 겸비한 보부아르는 다른 연애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서로가 서로의 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서로를 마음이 가장 잘 통하는 상대로 생각했으며, 육체적 사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서로를 아끼는 정신적인 플라토닉 사랑이었기에 가능했었을 겁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은 편지를 통해 사상과 지적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진실한 대화와 마음의 소통을 통해 그들의 사랑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 보부아르가 가장 힘들었던 점은 사르트르를 볼 수 없는 것보다 그와 더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었죠.
그래서 보부아르는 '죽음은 침묵'이라며 슬퍼했습니다
.
몽 파르나스에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공동무덤이 있습니다.
죽어서도 함께하길 바랬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들의 실존은 영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