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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유선생 Feb 06. 2023

가깝고도 먼 나라 미국

''가깝고도 먼 나라 하면 일본인데.''


''미국에 대한 여행 정보인가? 그건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를 보면 되는데.''


이렇게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미국에 대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해 보았던 것들을 정리한 글이다.



8.15 광복 후 거의 80년 동안, 미국만큼 우리나라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지리적으로 너무 먼 곳에 있다.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데, 그렇다면 이제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너무 먼 나라가 되었는가?


이 글에서는 어떤 정보를 담기보다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미국이란 나라를 접할 때 느낄 수 있는, 정서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


광복 후 바로 이어진 3년간의 미군정과,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해 3년간 계속된 6.25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는 여기서 거론할 필요가 없을듯 하다. 이후에 우리나라에 끼친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거론하는 건 글을 너무 딱딱하게 만들기에 웬만하면 생략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미국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담아보려 한다.



내가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에 대한 어떤 주관적인 시선을 어느 정도 형성한 이후에, 특히 기억에 남는, 미국이란 나라와의 첫 대면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된다.


196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겠지만, 우리집도 의식주가 형편 없었다. 강원도 산골에다가, 그것도 11 남매나 되는 대식구인 우리집에는 특히 먹을 게 부족해 쌀밥은 일년 내내 구경도 못하고, 어쩌다 보리나 감자로 밥을 지어 먹고, 거의 매일을 옥수수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여름에서 가을까지는 요즘처럼 그냥 옥수수를 통째로 삶아서 뜯어 먹고, 완전히 여문 옥수수는 말려서 알갱이로 모아 두었다가 맷돌로 갈아서 밥도 짓고, 국수도 만들어 먹으면서 겨울을 났다. 요즘처럼 찰옥수수가 아니라 딱딱한 메옥수수였기에 너무 맛이 없어서, 김치를 곁들이거나 고추장을 발라서 먹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시절, 어느날부터인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노란 옥수수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설탕이나 분유를 섞어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집에서 먹던 옥수수 밥이나 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상당히 맛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그건 공짜였다. 선생님들이 그게 미국에서 보내준 것이니, 감사히 먹으라고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빵을 만드는 옥수수 가루를 담은 하얀 자루 한가운데 찍혀 있던 로고는,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두 손을 굳게 잡고 악수를 나누는 그림과 그 아래 쓰여진 글,


''미국 국민이 기증한 것''


몇 해 동안인지는 모르지만, 그 옥수수 자루들은 항상 교무실 한쪽 벽에 층층이 쌓여서, 어린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들의 뇌리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풍요로움과 미국은 우리나라의 보호국이라는 인식을 상징적으로 심어놓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또한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로서, 미국은 공산군을 물리치고 우리를 위기에서 구원해 준, 가장 의지하고 싶은 키다리 아저씨로 인식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맹호부대, 청룡부대 용사들을 응원하는 노래를 부르느라, 블루진이나 팝송 같은 미국 문화에 몰입하면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메리칸 드림에 젖어서 살게 되었다.


특히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아빠나 형이 있는 집 아이들이 들고 다니던 전자 제품과, 미군복을 줄여서 입은 점퍼나 사지 바지, 등은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지금은 명분도 없는 더러운 전쟁으로 평가받고, 목숨을 담보로 얻은 부를 부끄럽게 말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지만,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때는 그것이 절대선이었다.



나는 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던 때 10.26과 5.18을 겪었다. 당시에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미국의 부정적인 면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미국이란 나라가 피부에 와닿는, 좀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은 1994년 겨울이었다.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내가 방학 기간 동안 그 먼 미국에 가서, 보름 정도 지내다가 온 것이다. 그냥 관광을 하러 간게 아니라, 미국에 먼저 가서 자리잡고 사는 우리 동포와 결혼한 처제가 향수병에 걸려 힘들어 하는게 안쓰러워서, 아내와 함께 위로차 방문한 것이었다. 나와 아내는 그것이 첫 해외 여행이었다.


처제집은 뉴욕 바로 옆에 붙어있는 뉴저지였는데, 항상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거기서 머무는 동안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좀 따뜻한 계절에 갔으면 주변을 산책이라도 하면서 지냈을텐데, 너무 춥기도 하고, 혼자 나가면 혹시나 길을 잃을까 봐 집에만 있어야 했다. 나이아가라는 얼어붙어 있다고 해서 못가고, 2박 3일 뉴욕과 워싱턴 관광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영어가 짧아서 누구한테 길을 물어볼 수도 없고, 강도가 무서워 어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모는 택시를 불러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관람하러 혼자 가 본게 고작이었다. 오죽했으면 집안에 갇혀지내는 게 너무 답답해서 한 달 후로 예매해 놓은 항공권을 바꿔서 나 혼자 보름만에 귀국했을까?


여하튼 그때, 미국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는 너무나 풍요롭게 산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쭉쭉 뻗은 넓은 도로, 바둑판처럼 잘 구획된 목조 주택 단지들, 집집마다 두세 대씩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 대형 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품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일반적인 사람들이 다들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처제네는 평범한 이민자였지만, 꽤 괜찮은 집을 소유하고, 대형차를 몰고 다니면서, 우리가 있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의 매일 커다란 쇠고기 등심을 오븐에 구워서 먹었다.



그런 기억 때문이었을까? 십여 년 후 이명박 정부 초기, 미국 쇠고기 수입으로 광우병이 창궐한다면서 온 나라를 들불처럼 뒤덮었던 촛불 시위가 이해할 수 없는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졌다. 그 쇠고기가 만일 호주나 아르헨티나에서 수입한 것이었어도,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을까?


그건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군부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비호나, 주한 미군장갑차로 인한 여중생 압사 사건 등을 거치면서, 어느 사이에 미국은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기본 도리도 저버릴 수 있는 나라로 인식이 바뀌어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저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던 반미 감정이 서서히 분출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몇 해 전에는 주한미군 보호와 북한의 핵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한반도에 미국에서 들여온 사드를 배치하는 문제로, 방위비 분담 논란으로, 온 나라가 국론이 분열되고, 미국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의 김정은과 문대통령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하고,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는 등, 한반도의 정세에 있어서 미국의 영향력은 아직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의 금리 인상이나, 자국 산업 보호 정책 등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는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가 이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뉴저지에 살다가 버지니아로 옮겨가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처제가 우리 부부에게, 미국에 와서 일도 좀 도와주고 여행도 하다 가면 어떤지, 여러 차례 연락을 해 왔다. 팬데믹이 끝나가며 경기가 회복되는 조짐이 보이자,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가게 되면, 거의 30 년만에 다시 미국 땅을 밟는 셈이었다.


나도 이제 살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는데, 가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나이아가라나 그랜드캐년 같은 곳은, 정말 꼭 직접 가서 보고 싶다. 나도 이제 은퇴해서 여유 시간도 많으니 갈 만도 한데, 20년 전 그 때의 기억이 별로 안 좋아 아내만 다녀오라고 했다. 더구나 요즘도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미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총기 사고나 마약, 인종 차별 문제 등, 우리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유럽이나 동남아 여행에 비해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특히 기분나쁜 건, 그들의 인종차별적 행태였다. 동양인이라고 함부로 욕을 하고, 심지어 폭행까지 한다는 건, 같은 동양인으로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만 3개월 동안 미국에 가서 관광도 하고, 동생 일도 거들어주면서 지내다가 돌아왔다.



우리에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는, 우리가 어릴 때 느꼈던 아빠의 이미지와도 비슷한 게 아닐까?


어린 시절의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무조건적인 시혜자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차츰차츰 아빠의 부정적인 측면들까지 알아가게 된다.


미국이란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너무나 어렵던 시기에, 미국은 우리의 생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거인이라서, 감히 그 뜻을 거스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국력이 성장하면서, 서로간의 이해가 충돌하기 시작했고,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의식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런 반미 감정 같은 것도 생성되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과정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너무나 오랜 기간을, 너무나 가까운 관계로 지내왔다. 만에 하나 헤어질 결심을 한다면, 잃을 게 너무 많을 것이다.


친구는 오래 묵을수록 좋다고 한다.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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