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말금
그날을 회상했어요. 무더운 날은 사라지고, 머리 위로는 아스라한 바람이 불어서, 식은땀을 말렸죠. 우리는 함께 걸었어요. 웃기도 하고요. 이웃에 있던 그 아저씨들 생각하면서 당황하기도 했어요. 단아하고, 조용하고, 고즈넉했어요. 그렇게 우리는 흘러 흘러갔어요.
이번 <자유연기>(2017, 김도영 감독)로 많은 관객들을 만나게 되신 것 같아요. 저 또한 <자유연기>를 통해서 배우님을 알게 되었고, 배우님에 대해 찾아보았더니 많은 활동을 하셨더라고요.
연기를 2007년에 시작했어요. 12년 차인가요. 영화는 찍기 시작한 지 10년 정도 돼가는 것 같은데, 연극하느라, 1년에 한두 편 정도 찍었던 것 같아요. 작년부터 마음먹고 단편영화를 찍었네요. 2, 3, 4, 5, 6, 7월 이렇게 찍었어요.
작년(2017년)에 더 많은 작품을 하셨군요. 작년부터 더 많은 영화에 출연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마흔이 되자 변화를 느꼈어요. 어머니가 아프시기도 했고, 나 자신이 원래는 조용하고 개인적인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요. 30대엔 연극도 물론 재미있게 했어요. 서른이라는 나이에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사람들과 함께 의지하면서 잘 지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더 개인적인 작업이 나에게 맞겠다.’라는 생각을 해요. 사람들과 얽히는 게 힘들기도 하고, 배우라는 입장에서는 연기를 할 수 있다면 영화건 연극이건 다 좋긴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개인적인 작업을 하고 싶은 시기가 온 것 같아요.
연극과 영화를 작업할 때 어떻게 다른가요? 영화가 개인적인 작업라고 생각하신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세요.
연극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이전에 동료들끼리 한 달 반 정도는 얽혀서 살아요. 저의 경우 연극에서 노역(老役)을 많이 했어요. 한 달 반 연습하면서 손자와 많이 친해지고 극 중 가족관계에 있는 배우에게 정말 애정이 생기고 그런 게 정말 좋을 때가 있어요. 반면에 그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죠. 너무 가까워져서 선을 넘는 일도 생기고. 동료 배우분들께, 후배 연출가에게... 실수하고 멀어진 경험들이 있고 상처도 교훈도 됐어요.
사람과는 가까우나 머나 긴장 관계 속에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영화는 모인 사람 각자의 할 일이 너무 명확해서 그런 일은 잘 없지 않을까... 사람과 끈끈해질 일도 적지만 그만큼 덜 얽혀서 좋은 점도 있는 것 같고... 아직은 저는 영화배우에 대해, 카메라 앞에서 할 일을 하고, 시나리오와 감독님의 디렉션에 충실하는 것, 그 정도만 생각해도 벅차거든요. 지금까지는 오직 그 목표만 보면 되니까 더 개인적인 작업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영화에서도 관객이 있듯, 사람들 속에서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배우이기 때문에 숙명적인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어요. 하나 더 이야기해보면, 연극에 임할 때는 씩씩함이 필요한 거 같아요. 발산하는 에너지 같은 거죠. 사람들과 씩씩하게 재밌게 살 땐 너무 좋은데,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서 징징거리거나 남 탓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던 것 같아요. 그런 시간들은 다 지나갔어요, 이제는 혼자 있는 고독한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요. 끝나더라고요. 이십 대, 삽십대를 지배하던 습관이 끝나는 시간이 있더라고요.
원래 성격은 어떠신가요?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인 것 같아요. 어느 시점에서는 연극하고 살면서 정말 좋았어요. 체력과 지력이 만나는 그 시점에는 친구도 많고 열정적으로 살았어요. 너무 철없어서 실수하기도 하고, 연극도 써서 올리고 깔깔 웃고 그렇게 살았어요.
4년 전부터 어머니가 다리를 못 쓰세요. 4년 전에 수술을 받기 시작하고, 재활병원에서 오랫동안 계셨어요. 어머니 곁에서 아픈 사람들을 보면서 다른 가치관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걸었던 산책이 정말 좋았어요. 언니도 정말 열심히 했고, 이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옮겨갔어요. 그런데 재작년 겨울에 제가 서른아홉에 어머니가 넘어지면서 골반 뼈가 부러지셨어요. 절망스럽고 우울해져서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고 한동안 엄마 곁에서 보냈어요.
이제는 다 나으셨어요. 저는 조용함을 찾았고요. 어머니가 늙고 있다는 것은 나 또한 늙고 있다는 거죠. 다른 지식과 경험들이 들어와요. 어머니가 알려주신 것 같아요. 요즘은 좋아요. 알았던 사람과 다 연락하고 지낼 필요는 없잖아요. 그 시기를 잘 보냈으니까 충분해요.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어떻게 보내시나요?
작년부터 꽃을 키워요. 뒤뜰에 쓰레기가 쌓여 있었어요. 그것을 치우고 씨를 뿌렸어요. 정말 예쁘게 잘 커 줘서 꽃 보는 게 취미가 됐어요. 꽃씨를 뿌려서 백일홍이 예쁘게 피었어요. 보여드릴까요?
<자유연기>에서 아코디언을 하시는 장면이 있어요.
원래는 취미였는데, 지금은 잘 안 해서 특기가 됐어요. 아코디언 쉬워요. 피아노 배워 보셨어요? 그럼 더 쉬울 거예요. 피아노를 반으로 접었다고 생각하면 되거든요. (웃음) 아코디언 장면은 첫 시나리오에는 없었어요. 감독님께서 우리 집에 회의차 오셨는데 아코디언을 보시고는 연주하느냐 물으셔서 한 곡 들려드렸더니, 그다음 버전 시나리오에 그 장면을 넣으셨어요.
<자유연기> 촬영 현장에서의 더 많은 에피소드가 궁금해 지는데요?
김도영 감독님이 글도 잘 쓰시지만, 연기도 굉장히 잘하세요. 어떤 상황에서 먼저 연기를 보여주시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감독님 연기가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제가 기가 죽으면 또 그걸 알아보셨어요. 끝까지 뭘 고집하는 일이 없었어요. 생생한 어떤 장면이 있으면 계획을 수정해서 찍는 거죠. 7월에 찍었는데 촬영하는 집에 에어컨이 없었어요. 그래서 지친 연기에 도움이 됐어요. 결국은 점점 지쳐가는 흐름이었으니까요. 남편으로 출연하시는이재인 배우님이 자의식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자유롭게 연기를 하시더라고요. 안 웃으려
고 엄청 노력했던 것 같아요. (웃음)
사실「자유연기」는 제작비가 넉넉하지 않은 가난한 영화였어요. 중고신인으로 나오는 미아(가명) 언니가 용돈을 보내주셨어요. ‘머리도 하고 싶으면 하고, 택시도 타고 싶으면 타라’고요. 당시에 저는 좀 힘들었어요. 영화 준비하면서 마트 시식코너에서 일하고, 교열이라고 점자 도서 편집하는 일도 했어요. 미아 언니가 저한테만 주신 건 아니셨을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분이에요.
저는 <자유연기>의 마지막 장면이 굉장히 기억이 남았어요. 그 연기를 보신 감독님이나 스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컷에 찍었고, 여덟 테이크를 갔어요. 뒷부분이 조금 잘렸죠. 오디션 장면은 하루 만에 다 찍었어요. 어떤 순간을 만나야 하는지 감독님과 뭔가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되지 않자 많이 쫓겼어요. 다들 쫓겼어요.
굉장히 많이 우셨을 것 같아요.
아파트에서 찍는 장면들은 제 공간 같았어요. 그런데 왜인지 오디션 장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마음이 그러니 연기가 좋지는 못했어요. 감독님께 ‘저 시간 좀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좀 천천히 마음을 다독이면서 찍었던 것 같아요. 영화에 쓰인 장면은 2번째 테이크가 쓰였네요.
<자유연기>에 대한 본인의 만족도는 어떠신가요?
리딩을 많이 했어요. 저는 리딩이 너무 괴로워요. 영화는 글보다 그 상황에서 존재해야 하는 것 같은데 리딩을 할 때는 그 말속에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설명이 들어가게 돼요. 그러고 나면 그렇게 리딩 한 게 입에 붙을까 두려워거든요. 그래서 <자유연기>를 할 때 리딩이 마음이 안 들었어요. 그러다가 촬영 전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켄 로치 감독)라는 영화를 봤는데 배우들이 그 상황에 녹은 것처럼 보였어요. 영화를 본 후 시나리오를 다시 혼자 읽었는데 목소리를 찾았다 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2회 차 때 아기가 온 날인 데요. 아기 컨디션에 맞춰 정신없이 찍다 보니 찾았다고 느낀 감이 없어져버렸어요. 낙심했어요. 다시 좋은 감을 찾을 때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인트로에 노래가 나오는데, 제가 촬영 때 자장가 중얼거리는 걸 감독님이 보시고 후시 녹음 때 해보자 하셨어요. 마지막 편집본을 보니 그 중얼거리는 노래를 인트로에 넣으신 거예요. 그게 들어간 버전을 보고 ‘이제 좀 좋구나.’라고 느꼈어요.
사실 영화를 볼 때는 촬영 현장에서 어땠는지 그런 상황들이 생각나거나 후회되지 전체적으로 평가하기는 힘들어요. 전주에서 처음으로 큰 화면에서 보고는 저 여자가 우울증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 연결되는구나 정도 느꼈고 그 이외에는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연기가 마음에 드는 장면은 있어요. 첫날 찍은 장면들인데, 남편과 대화하는 장면, 전도사가 온 장면들이 마음에 들어요.
<자유연기>를 보고 러브콜이 많이 왔을 것 같아요.
감사하죠. 정말 감사하면서도 ‘연극하는 것과 다르게다 노출될 수도 있겠구나, 이제부터는 막 할 수 없구나.’를 깨닫고 선택에 신중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님이 처음 연기를 시작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서른 되기 전에 7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어요. 괴로웠던 20대가 끝나가자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른 살에 ‘수레무대’라는 극단에 들어갔어요. ‘수레무대’는 스물 세살 때부터 좋아했어요. 부산에 초청된 공연을 처음 봤는데, 공연이 정말 좋았었고, 부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형극이었어요. 그때 이후로 마음에 품고 있다가 연출님께 메일을 썼어요.
연출님은 반 고흐도 서른 살에 그림을 시작했다며 선뜻 저를 받아주셨어요.
배우님이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이 있을까요?
사실 그런 건 없어요. 노동자라고 생각해요. 연기 노동자니까. ‘일을 해야지’라고 생각하기도 해요.(웃음) 10년 전에는 하고 싶은 역이 있었어요. 극단에서 「곰」이라는 연극을 했는데,작가가 안톤 체홉이예요. <자유연기>에서도 그의 작품 「갈매기」의 독백이 나왔었지요. 연극인들은 안톤 체홉을 사랑해요. 거기에 뽀뽀바라는 신경질적인 귀족 여인이 나오는데 뽀뽀바를 하고 싶었어요. 자기 남편이 죽고 난 후 상복을 입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코미디 연극이에요. 다른 분들의 연기를 구경만 하고, 결국 못 했어요. 이후에 「갈매기」를 하게 됐는데 그 당시에 제가 뽈리나라는 역할을 맡았어요. 하고 싶은 역이 아니었지만 좋은 상대역을 만나서 결국에는 뽀뽀바의 마음으로 뽈리나를 했어요. 제가 원했던 그 역할을 바로 하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후에 좋은 분들과 좋은 역할도 정말 많이 했고요. 그런 좋은 배우분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연극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게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님의 출연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 영화를 추천해주신다면요?
2009년에 찍은 <용태> (2010/이건욱 감독)라는 작품이요. 그 영화의 생각에 꼭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 보고 나서는 세계가 하나 만들어졌다고 느꼈어요. 감독 자기만의 추구하는 지점이 느껴지기도 하고, 강렬한 감정 하나가 저에게 오기도 했던 것 같아요. <용태>라는 영화는 감독님의 것 같았어요.
<용태>에서 약간의 노출 장면이 있었잖아요. 그때 당시에 그 정도 노출이면 꽤 부담되었을 것 같아요.
시나리오 때부터 속옷만 입는 장면이 있는 걸 알고 들어갔어요. 감독님이 속옷을 사다 주셨어요. (웃음) 속옷만 입은 장면이 신경은 쓰였지만, 그렇게 괴롭지 않았어요. 여러 테이크를 가긴 했지만 한 컷이었기 때문에 잘 해냈던 것 같아요. 베드신은 모르겠지만 어쩌다 옷을 갈아입듯이 몸을 노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저는 팔다리가 길고 늘씬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더니, 감독님은 평범할수록 좋다고 했었
어요.
배우님의 큰 강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대사를 잘 못 외워요. 오래 걸려요. 오래 걸리는 것 자체가 힘일 수 있어요. 쥐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생각이죠. 제가 가지고 있는 힘은 생각이에요. 맥락을 보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큰 건 배우려고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은 경험을 갖고 있다는 사실 같아요.
저는 0에서 시작했어요. 극단에서 대사가 없었어요. 부산 사투리를 계속 쓰고 살다가 평소 말도 무대에서 쓰는 말로 하자라고 연출님이 제안하셨는데, 그때부터 너무 쑥스러워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대학 시절 했던 대사들은 억양을 그려보고 외워서 했는데, 극단에서는 대사를 즉흥적으로 하는 것을 중요시했어요. 입을 열 수가 없었어요. 글을 말로 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부분을 파는데, 몇 년이 걸렸어요. 그래서 너무 늦
됐어요. 늦됐지만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을 배운 거죠. 배워서 해냈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힘으로 살아가는 거죠. 난 이것을 못 한다는 생각이 들면, 배웠던 기억을 가 지고 있으니까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전환해요.
30대 중반까지는 철없이 재미있게, 배우고 느는 맛으로 살았고, 지금은 가정에 대한 책임감 같은 생각을 더 많이 해요. 이제는 저에게 연기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죠. 밥을 먹고 가족들에게 진 빚을 갚고.
아는 분이 ‘평생 쥘 수 있는 좋은 동아줄을 잡았구나.’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생각해보면 사람이 낡아가지 않게 하는 정말 큰 업을 얻은 거니까 괴롭기도 해요.
하지만 해야죠.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정말 신이 나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음 작품을 결정하거나 영화를 선택하시는 기준이 있을까요?
제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작품의 언어가 빈약하면 좀 꺼려지는 것 같아요. 글 쓰는 방식도 지금의 20대들은 말이 글이 되는 시대잖아요. 하지만 저는 반대인 것 같거든요. 어떤 글은 받아보면 그냥 입말을 옮겼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언어를 재료로만 썼달까요. 물론 영화는 잘 찍을 수도 있지만 제가 받는 것은 시나리오밖에 없으니 언어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오디션을 볼 때 너무 틀과 격을 갖추고 하면, 마음이 좀 닫히더라고요. 미팅이 좋거든요. 몇 명이 테이블에 쭉 앉아 있고 ‘이거 해보세요.’ 하면 오디션은 배우의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해지더라고요.
차기작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10월에 연극 공연이 있어요.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이라는 연극이고,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라는 작품의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와 새롭게 창작한 작품이예요.
제가 아직 영화인이라고 하기에는 영화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맞는 것 같아요.
현재로서는 영화하는 배우가 할 일은 감정에 물든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그 순간의 감정이 무엇인지, 그걸 모르면 현장에서 여러 테이크를 갈 수가 없고, 우연은 없다고. 지금은 그것까지만 알고 있어요. 그런 부분을 더 연구해서 좋은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요.
배우고자 힘쓰면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알게 된다.
방법을 익히려고 하면
날이 갈수록
할 일이 줄어든다
점점 줄어
할 일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으리라
Tao-Ching
프레드릭 르봐이예 <평화로운 탄생> 중에서 인용
배우 강말금 필모그래피
연극
2007-2009
<비보이 피노키오> 피노키오 역 (극단 수레무대)
<어린왕자> 어린왕자 역 (극단 수레무대)
2011
<갈매기> 뽈리나 역
2012
<뻘> 할머니 지막이 역 (두산아트센터 / 극단 달나라동백꽃)
<로풍찬 유랑극단> 남장여배우 고봉자 역 (극단 달나라동백꽃)
<채상하나씨> 죽은 아내역 (CJ 아지트)
2013
<없는 사람들> 영식엄마 역 (극단 동네방네)
<뻘> 할머니 지막이 역 (광주시립극단)
<헤비메탈걸스> 노처녀 박부진 역 (극단 명작옥수수밭)
2014
<헤르메스> 맹인안마사 유정숙 역 (극단 우인)
<로풍찬 유랑극단> 남장여배우 고봉자 역 (극단 달나라동백꽃)
<민들레 바람되어> 노부인 역 (수연재씨어터)
2015
<경숙이, 경숙 아버지> 애첩 자야 역(극단 골목길, 수현재씨어터)
<순우삼촌> 이모 수자역 (극단 두비춤)
2016
<오레스테이아> 여왕 클레타임네스트라 역 (극단 달나라동백꽃, 극단 산울림)
<게임> 플로렌스 / 마가렛 역 (두산아트센터)
<민들레 바람되어> 노부인 역 (수현재씨어터)
2017
<리처드3세> 마거릿 왕비 역 / 에드워드 왕세자 역 (아르코 대극장)
<후시기나 포켓또> 가네코 후미코역 (블랙텐트)
<트로이의 여인들> 헬레네 역 (떼아트르 봄날)
2018
<K의 낭독회> K역 (삼일로 창고극장)
영화
<세시, 승민> 2009
<용태> 2010
<거꾸로 선 용서를 위하여> 2012
<보통날> 2012
<보이스 비 엠미셔스> 2015
<언니가 죽었다> 2016
<새벽은 짧다> 2016
<재재월드> 2017
<백일몽> (2017)
<반드시 잡는다> 2017
<우상> 2017
<자유연기>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