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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Oct 24. 2021

그림 그리는 아이가 머무는 곳

허무하게 내려놓은 꿈이 있나요?


웜그레이앤블루의 일간 연재 프로젝트 <저 여기 있어요> 시즌2 수록글입니다.



내 그림은 툭하면 전교를 떠돌았다. 미술 시간에 제출한 그림을 선생님이 샘플 삼아 다른 반에도 들고 들어가서 그렇다.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그랬다. 같은 반 친구 어머니를 만나 인사하면 “아, 네가 그림 잘 그리는 수진이구나?” 하셨다. 백일장은 그림 넣고 상 먹는 게임이었다. 매번 1등은 아니었지만 은상이든 장려상이든 꼬박꼬박 받아 왔다. 학창 시절 수진에게 미술이란 대한민국에 양궁이나 쇼트트랙 같은, 뭐 그런 거였다. 늘 나의 어깨를 으쓱하게 해줬고, 이것만은 내가 제법 잘한다고 눈치 보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다.


학교 밖에서도 그림을 많이 그렸다. 미술학원은 내 인생에서 꽤나 큰 부분이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1학년쯤까지 내리 다녔던 동네 미술학원의 이름은 ‘화가실습’이었다. 이 이름이 얼마나 황홀한 것인지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나는 그곳에서 수채화에는 흰색과 검은색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물감을 팔레트 안쪽에서부터 꽉 채워서 짠다는 것을, 풀을 잘 먹인 좋은 붓이 하나만 있으면 크기 별로 여러 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명암을 배우고 반사광을 배우고 원근법을 배웠다. 학교 미술수업만으로는 또래 친구들이 잘 알 수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익히며 행복해했다. 뭐든 쉽게 질려 하는 내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말하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학원이었다.


영광의 날들은 예상보다 빨리, 허무하게 끝났다. 특목고 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미술학원을 관뒀다. 고등학교에선 미술 시수가 확 줄었다. 1학년 땐 아예 커리큘럼에 없었고, 2학년 때도 맛보기 차원이었다. 방과 후 활동으로 동양화 수업을 잠깐 들었는데, 이때 선생님이 나에게 조상 중에 혹시 화가가 있느냐고 물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심하면 교실 칠판에 반 친구들 얼굴을 캐릭터로 그려놓곤 했는데 다들 좋아했다. 자기 얼굴을 그려달라며 연습장을 들고 오기도 했다. 덕분에 어릴적 줄곧 으쓱했던 어깨가 잠시 제 자리를 찾았다가도, 수능 모의고사 한 번이면 쑥 내려갔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더이상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기·장기란을 늘 ‘그림 그리기’로 채웠던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입사지원서에 적은 건 ‘음주’였다(이러면 강인한 인싸처럼 보일 줄 알았다). 내 안의 그림 그리는 아이는 그렇게 거짓말처럼,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왜 그렇게까지 쿨하게 그림을 놓을 수 있었는지를 이따금 생각한다. 예술고등학교라는 선택지도 분명히 있었고, 준비하는 친구들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어? 얘도 미술 좋아했나?” 싶은 의외의 친구들도 중3이 돼서 입시 미술학원 문을 두드리곤 했다. 난 묵묵히 특목고 입시학원에서 새벽 1시까지 자습을 했다. 살면서 가장 많은 칭찬을 들었던 재주보다도 공부가 더 가능성 있다고 판단한 근거는 뭐였을까. 선생님도 부모님도 예고를 가라고 ‘제안’해주지 않아서…는 사실 두번째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자신이 없어서였다. 내 한계가 너무 보였다. 눈으로 관찰한 걸 재현하기는 잘하지만 영 독창적이지 못한 것 같았다. 수행평가로 시키는 건 곧잘 그려도 뚜렷한 평가 기준이 없을 땐 길을 잃었다. ‘우리 반에서’ 또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잘 그리는 애’까지가 내가 누려도 되는 인정일 것 같았다. 이걸로 먹고 살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 내가 퍽 이성적이고 똑똑한 줄 알았다.


추석에 내려간 집에서 엄마가 차곡차곡 모아둔 내 그림들을 봤다. 그 많던 스케치북에서 간직할만한 그림들만 낱장으로 뜯어 정리해둔 엄마의 컬렉션이었다. 4B 연필로 그린 소묘부터 색연필화, 수채화, 포스터컬러를 이용한 데칼코마니, 색종이를 오리고 접어 붙인 콜라주 등 다양하게도 있었다. 대단할 것 없다고 생각했던 그림들인데 다시 보니 마냥 기특하다. 아홉 살, 열두 살 꼬맹이가 이렇게 그렸다고? 이렇게 형태를 잡고 색감을 고르고 이렇게 과감하게 붓질을 했다고? 더 놀라운 건 몇몇 그림들은 어떤 날씨에 미술학원 어떤 테이블에서 선생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그렸는지까지 또렷이 기억이 난다는 점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그림 그리는 아이는 무지개색 고무줄이 감긴 교정기를 했다. 뺑글이 안경을 쓰고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다닌다. 미술 선생님을 마귀할멈이라고 부르면서 친구들과 시종일관 깔깔거린다. 그림이 잘 안 풀려도 웬만해선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다. 기름 냄새 폴폴 내며 유화를 시작한 언니를 부러워했다. 나는 언제 유화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선생님은 아크릴화를 다 익히면 유화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아크릴화에 익숙해질 때쯤 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나는 아직도 유화를 그려보지 못한 채 멈춰있다.


열네살 수진이를 만나면 말해주고 싶다. 조금은 더 그려봐도 된다고. 계속 그리다 보면 ‘너의 것’이 생길 수도 있다고. 끝내 찾지 못해도 그림으로 먹고 살 길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시키는 걸 잘 하는 것도, 전략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도 쓰임이 있을 수 있다고. 미술이라는 게, 꼭 가난한 화가가 되는 삶으로만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예고에 가면 어떨지 엄마한테 물어나 보라고. 물어보지도 않고 지나오면 두고두고 후회한다고. 매일 아침 포털에 경찰서 이름을 검색하는 직장인보다는, 그림 그려 먹고 사는 직장인이 체질에 더 맞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좀 더 그리면서 선택을 미뤄보자고. 이렇게 성심껏 설득하는 서른셋 수진이를 만났어도 열네살 수진이는 지가 다 컸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어서 바뀌는 건 없었을 거다. 그래도, 누군가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림 그리는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이 나 하나일 리 없다. 어려서 그림에 소질 있던 이들이 모두 미술을 전공하진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든 그림을 그만둔다. 버리든지, 버림받든지, 버림받고선 스스로 버렸다고 생각하든지, 버려 놓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든지. 그렇게 튕겨 나온 그림 그리는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이패드로 깨작깨작 낙서를 하며 즐거워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아주 멀리 가진 않았다고 느낀다. 그림 그리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있을지 모른다. 평가받고 선택받을 일 없는 세상에서 원없이 그림을 그리고 살면서, 어른이 돼버린 우리가 자신을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림 그리기’를 특기에서 지웠던 주제에, 내 힘으로 돈을 벌자마자 야심차게 지른 게 있었다. 프리즈마컬러 유성색연필 132색 세트다. 내 돈 주고 안 살 땐 미술 도구 비싼 것도 잘 몰랐는데, 색깔 나오는 연필이 뭐 이렇게 비싼지 결제하면서 크게 심호흡했던 기억이 난다. ‘취업만 하면 그림 다시 제대로 시작 할거야’를 염불처럼 외며 살았던 나에겐 상징적인 구매였다. 그래놓고는 먹고 살기 바빠서 색연필 박스 뚜껑을 몇 번 열지도 못했다. 그림 그리는 수진이는 그렇게, 20년이 다 돼가도록 눈치만 살살 보면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어릴 땐 그림을 왜 그리냐는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그림을 왜 그리지 않느냐는 질문이 더 마음을 후벼판다. 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 삶에서 거짓말처럼 증발해버렸던 그림을 조금씩 찾아오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찐한 기름 냄새에 콜록거리면서 유화를 배울 수 있는 화실을 찾아봐야겠다.


2021.9.25




(여담)

연재할 때 팩트를 잘못 쓴 부분이 있어 고쳤다. 취업하고 야심차게 지른 게 프리즈마컬러 36색인줄 알았는데, 그건 백수 시절에 이미 갖고 있었고 새로 산 건 132색이더라. 어쩐지 심호흡하고 샀던 것 치고는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뭐지...? 했는데 서랍을 뒤져보니 132색 박스가 들어있던 것.. 사놓고 얼마나 안 꺼내 썼으면 갖고 있는 줄도 몰랐니 수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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