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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Mar 13. 2024

가난이라는 핑계

사전에 나와있지 않은 가난의 예문은 이러했다. 낡을 대로 낡은 우리 집에 온 친구의 표정을 보며 우리 우정이 여전한지 확인하는 것. 학원을 공짜로 다니게 해주는 등, 받고 싶지 않은 남의 호의를 받아야도 하는 것. 저번에 주문한 엄마의 김치를 잘 먹었다며 빈 김치통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돌려받는 것. 술에 취한 아버지의 지갑을 호주머니 춤에서 꺼내어 돈을 세어보는 것. 학급 친구들 앞에서 너는 우유값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는 선생님 앞에서 당황하지 않는 것.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난하다는 이유로 헤어지자는 끝장면이 되풀이되는 것. 가난함을 비출지도 모를 행색을 남몰래 다듬게 되는 것. 하고 싶은 일엔 돈이 들기 마련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과연 내 분수에 맞는지를 가리는 것. 그리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이상 쳐다도 보지 않게 되는 것.


가난은 위장을 잘했다. 가장 즐거운 순간에 가장 아끼는 이의 얼굴을 하고 날 잔뜩 벌겨벗겨놓은 상태에서 지금 네 꼴을 보라고, 네가 감히 무얼 꿈꾸냐며 다그치곤 했으니까. 겹겹이 싸인 채로 표정을 숨기며 사는 나의 재미없는 얼굴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다 다른 이의 순진무구한 미소 사이에 있다 보면 속이 뒤틀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망가지지 않은 그 얼굴이 내 것처럼 되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저 그 얼굴들 사이에서 내가 유독 고장 난 듯한 그 느낌이 싫었을 뿐. 따라 하다 보면 나도 감쪽같이 무구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될까도 싶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선 웃는 연습을 했다. 부족한 것 하나 없어서 초연하다는 듯 입만 웃고 있는 표정을 꾸몄다. 그렇게 능숙해진 채로 잊고 지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망가지지 않아 보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심지어 정답으로 살고 있는 것으로도 보일 것이다. 그렇게 1인분의 삶을 해내고 나니 공허하다. 겉으로는 정육면체의 반듯한 상태로 보일 테지만 속이 텅 비어있다. 언제든 부서질 수 있을 만큼 점점 겉만 부푸는 상태로 나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가난이라는 핑계가 가고 나니 아무 생각 없이 내 몫을 하는 삶에 물린다. 욕심일까. 이제야 가짜로 웃는 척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겨우 내 살림을 꾸렸는데, 진짜로 웃고 싶어지기까지 하다니. 아직 한 번의 실패도 두려운 내가 그동안의 수확을 저버려도 되는 건지, 어떻게든 이 궁리를 멈출 거리를 찾고 싶다. 이 속에서 뜨겁게 꿈틀거리는 게 무엇인지 파헤쳐 보고 싶기도 하다. 갑자기 생긴 이 용기가 무서우면서도 반갑다. 동시에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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