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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Oct 02. 2024

훔친 취향

취향 ¹ | 趣向

명사 |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


취향이랄 게 없는 아이였다. 어떤 색깔이 특히 좋다고 말하거나, 티브이 광고에 나오는 장난감을 보며 박수를 치는 일을 참아야 한다는 걸, 그냥 알고 있어서였다. 단칸방에는 그 누구의 취향도 들일 여백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섣부르게 좋아하고 있다가 다른 식구에게 금세 들키게 될지도 몰랐다. 그땐 진심을 숨기는 게 더욱 서툴렀으니까. 혹여나 내 주제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외양에 마음이 동할 것 같으면 재빨리 땅바닥을 봤다. 손톱을 깨물기도 하고. 공기알을 하나라도 놓칠 때마다 –1 단계로 돌아가는 공기놀이를 했다. 그러다 보면 욕심이 정리가 되었다. 어느 날에는 엄마가 무리를 해서 사온 내 것이 운 좋게 생기는 날도 있었다. 내 마음에 드는지 묻는 엄마의 말에 살펴보지도 않고는 우선 좋다고 했다. 저걸 사느라 엄마가 얼마나 등골이 빠지게 일했을 건데, 며칠 밤은 펼쳐보지 않아도 막막할 가계부를 생각하며 끙끙 앓을 텐데. 아무렴. 좋아야지. 어련히 엄마가 알아서 내 것을 잘 골랐을까. 저걸 들고 오는 엄마의 든든했을 발걸음을 떠올리며 그렇게 그냥 좋아하기로 했던 시간들이 쭉 이어졌다.

그러다 취향이랄 게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건 어느 친구 S를 얻고 나서였다. S는 당차고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은 아이였는데, 나는 그 점 때문에 S와 친하게 지냈더랬다. 끼리끼리라는 말을 그 친구와 있을 땐 자랑스럽게 쓸 수 있었다. S가 페달을 밟는 자전거에 내 몸을 싣고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방과 후와 주말 여가시간에, 학교 친구들이 친해지고 싶어 하는 S와 단둘이 어울리는 동안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 집 식구들과는 못해봤던 일들을 해보게 되었다.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다가 지하 식당에 가서 라면을 먹으며 쓸모없는 시간을 여유롭게 나눴다. 내가 물을 무서워하는 걸 알게 된 어느 날엔 동네 수영장 어린이 풀장에서 물에 뜨는 법을 S에게서 배우기도 했다. 내 허리보다도 낮은 물 높이에서 물에 뜨는 시도를 하다가 물만 잔뜩 먹고는 얼굴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S는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모른 채로 나 역시 그냥 웃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남는 시간엔 S처럼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고. 나도 S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여름부터였을 거다. 내가 S의 취향을 슬쩍 훔쳐오기 시작한 건. 취향을 도둑질할 때에는 욕심을 다스릴 수 있어야 했다. 누구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알았다. 내 분수에 맞지 않는 걸 운 좋게 한번 소유하게 되면 다음번의 행운을 갈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S와 여가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S의 취향에서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가족 몰래 나 역시 구할 수 있는 것들만 골라내었다. 특히 외국 문화를 좋아했던 S는 자기 집에서 고급 CD플레이어로 팝 가수들의 노래를 곧잘 들려주거나, 내가 모르는 영화배우 이름을 말하며 영화 감상을 나눠주기도 했다. 낯선 노래와 낯선 이름을 들은 후엔 어서 걔의 취향을 내게 덧씌우고 싶어서 일정이 끝난 후 얼른 집에 뛰어간 날도 있었다. 내 본색을 S가 알아차릴까 봐 종종거리면서도 S의 취향을 슬며시 훔칠 생각에 신나 있던 이상한 시기였다.

S의 취향은 정품이었지만, 내 것은 수치스러운 복제품이었다. 쉬이 배급되지 않는 진짜는 가난한 10대에게 그저 사치였다. P2P 사이트에서 불법으로 다운로드한 노래와 영화를 CD용으로 다시 인코딩하고 공CD에 구웠다. 온 하루가 걸리는 일이었다. P2P로 연결된 사람들의 조각조각 중 어느 1 퍼센트의 조각을 영영 얻지 못하면 일주일을 넘게 컴퓨터를 켜두어도 결국엔 다운로드에 실패하기도 했다. S에게 네 것을 빌려달라고 하거나, 나도 그 노래와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던 거짓말을 번복하는 게 부끄럽다는 이유로 훨씬 부끄러운 짓을 했다. 그땐 다들 그렇게 봤다는 말로, 이제는 제값을 주고 본다는 말로 지워낼 수는 없는 얼룩들이 무기명의 CD들로 쌓여갔다. 뒤섞이면 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져 그것들에 이름을 적어주어야 했다. 또박또박 글자를 적는다고 해서 정품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썼다. 대신 아주 작은 글씨로. 스크랩북을 문방구에서 사다가 내 취향들을 정리해 넣고선 비닐 결을 다듬었다. S를 초대할 일이 없을 우리 집이지만, 혹여나 S가 오진 않을까 싶어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스크랩북을 숨겼다. 그 쿰쿰한 곳에서 움트고 또 자란 것이 지금의 내 취향이다. 가끔 이걸 사람들 앞에서 그럴싸하게 내세우고 싶어질 때면 S를 떠올리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 맞다, 그거 원래 S에게서 훔친 거였지,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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