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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Dec 13. 2024

정작 마주한 건

<i를 위하여> 낭독극을 보고 와서

어젯밤엔 ‘인스크립트’라는 연극, 영화 전문 서점에서 열린 낭독극인 <i를 위하여>를 보고 왔다. 낭독극은 내게 낯선 형태의 예술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러 간 것은 글방 친구였던 은조 님이 출연하기 때문이었다. 지난 7월에도 은조 님이 출연했던 연극인 <우리가 로맨스를 떠올릴 때 소환하지 않는 풍경의 경우의 수>를 보러 갔었다. 글방에서 자신의 글을 담담하게 낭독하던 모습만 봐왔기에 무대 위에서의 모습이 영 상상이 가지 않았더랬다. 무대와 관람석의 간극을 마주하고 바라보게 된 글방 친구는 말 그대로 배우가 되어 있었다. 공연용으로 제작된 담배를 손에 쥐고 담배 연기를 마신 후 자유로운 몸짓과 함께 대사를 허공에 던지는 모습에서 그 공간을 다스리는 장악력이 느껴졌다. 비교적 결이 보드라운 스토리였음에도 그녀의 연기가 워낙 생경하고 빛이 나서였을까. 압도시키려는 사람 없이 나는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줌에서 매주 한 번 만나던 글방 친구가 말만 배우인 게 아닌 진짜 배우였다니. 그 연기를 더 오래 보고 싶었다. 그러다 곧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조승우 씨를 비롯한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는 연극 <햄릿>의 ‘오필리아’ 역에 은조 님이 단독 캐스팅되었다는 것. 담담한 슬픔을 그려낼 줄 아는 배우가 그려낼 죽음은 어떤 표정일까, 내가 알고 있던 배우들과의 합은 어떠할까, 너무 궁금한 마음에 티켓팅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티켓팅 시간을 기억하고 손을 재빨리 움직이는 것은 정말 어려웠기에 이번엔 취소 표를 노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취소 표가 풀리는 시간을 기억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려웠고, 어쩌다 취켓팅을 해야 한다는 게 기억난 날엔 취소 표를 찾을 수 없었다. 아마 나보다 빠른 사람이 있어서 선점했거나, 취소를 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석에서 은조 님한테 어떻게 연기하실 거냐고 조금만 보여 달라고 <연예가중계> 리포터처럼 구는 것은 절대로 아니 될 일이었다. 다음 기회에 또 보러 갈 수 있겠지,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게 한두 계절 지나 볼 수 있게 된 것이 어제 본 <i를 위하여> 낭독극이었다. 배우 활동도 하시는 이창현 작가님의 첫 창작 원고 및 초고로 진행되는 극이라고 했다.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질책하듯 앉아 있는 관객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단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인지 재미있게 볼 자신이 있는지 꼼꼼하게 작품 설명을 읽어본 후에 관람 신청을 했다. 그중에 내 이목을 끈 것은 이 부분이었다.

[공연 소개]

“인스타그램에서 만들어진 삶으로 관심을 구하는 설이는 어느 날 유명인의 DM을 받는다.”


나는 당연히 영화배우 정우성의 이야기인 줄 알고 재밌겠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래서 신청해서 온 거였는데, 그 영화배우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영국 옥스퍼드대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인 “brain rot”이 떠올랐다. 내가 너무 자극적인 온라인 콘텐츠에 절여져 있었나 보다. 암튼 더 이상의 극 내용은 말할 수 없다. 다만 아이유가 나오지 않는 극이라는 것 정도까지만 알려줄 수 있다.

[작가의 말]

다음 이야기를 쓰지 못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쓰지 않았을 수도 있고 쓰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늘 팔짱 끼고 다 안다는 듯이 얘기하지만, 당연히 그들에 저도 포함됩니다. 지금까지 끝을 보지 못했던 모든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역시 작가의 말은 책을 다 읽거나 영화나 극을 다 본 후에 와닿는 것일까. 지난주도 지지난 주도 글방에 글을 내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 또는 언젠가 책을 내야지 하고 글만 연신 쌓아두고 퇴고하지 않는 오랜 글방 친구들만 보라고 숨겨놓은 이스터 에그 같았다. 사실 요즘 시국이 이러이러하다는 이유로 무슨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하기를 미루고 다음 책 퇴고 작업이 뭐 급한가 하면서 미루고 했는데. 글방 친구가 아닌 배우 은조 님을 구경하러 왔다가 무어든 끝내질 않고 있는 나를 보고 오게 되어버렸다. 마음을 다잡고 계속하길 멈추었던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끝을 봐야 하니까. 그리고 진정 끝에 가까워진 순간 미련 없이 우렁찬 목소리와 커다란 동작으로 “안녕! 잘 가!!! 다시 보지 말자!!!!!”라고 인사해야 할 거다. 그래야 다음 끝내지 못한 것의 멱살을 잡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 아마 그 멱의 주인은 당연히 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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