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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Mar 14. 2023

아나운서 엄마, ABA 하다

[프롤로그]

"아나운서 하다가 왜 ABA를 하게 되셨어요?"


내가 ABA의 세계에 발을 들인 뒤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바로 이것. 과장 조금 보태 100번 정도 맞닿았던 물음표.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 방송사 합격 통보를 받았던 이후, 내리 10년을 '방송'만 했으니 제법 가까운 내 사람들부터 데면데면 가까스로 소식만 주고받던 지인들에 이르기까지 참 궁금할 법도 하다. 도대체 아나운서 박수현은 10년 남짓 제법 안정적인었던 자리, 지역 MBC 정규직 아나운서로 지내오다가 이름도 생소한 'ABA'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메인뉴스 앵커에, 정오의 희망곡 DJ에,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 석사 유학을 마치기까지, 이력서만 쭉 봐도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속에만 머물 것 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새로운 커리어를 찾아 나서게 된 걸까.




ABA. Applied Behavior Analysis (응용행동분석)의 약자. 응용(?) 행동분석(?), 처음 접할 땐, 조합된 단어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질 법도 하다. 한 마디로 인간의 행동이 일어날 때 그에 관여하는 환경적 요인들과 원인 결과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기능적 행동들을 지원해 나가는 분야다. 장기적으로는 사회생활을 순탄히 해나가는 데 '문제'로 낙인찍힐 만한 도전적인 행동들을 소거(Extinction) 해나가고 긍정적인 행동들을 강화(Reinforcement) 해나가며 한 개인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게끔 철저히 근거기반 전략(Evidence Based Practice)으로 행동을 분석해 나간다. 주로 ABA는 자폐스펙트럼 장애 (ASD, Autism Spectrum Disorder) 징후를 보이는, 혹은 진단을 받은 어린이들을 조기 중재해 나가는 데 효과적인 치료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국내외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많이 마주하는 분야 중 하나.


도대체 왜 아나운서 엄마는 응용행동분석의 길에 들어서게 된 걸까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동력으로 가족의 영향을 빼놓을 수가 없다. 가장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하다 보면 그들의 노동과 그 안에 결집된 땀마저 한 순간 한 순간 함께 느낀다. 그러다 보면 전혀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커리어마저 내 꿈을 키워가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 (Boston University), 심리상담 및 행동의학 (Mental Health Counseling & Behavioral Medicine) 파트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남편의 영향도 결정적 ‘점’들 중 하나. 남편의 세부전공과 구체적인 연구 분야와는 엄밀히 다를지라도 맥을 같이 하는 관련 분야들에 대해 소소한 수다들이 쌓이다보니 서서히 행동분석의 세계에 스며들 수밖에!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부터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 어린이집을 운영해 온 친정어머니의 오랜 커리어도 은근한 영향력 둘. 내 인생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직업과 일상이 이러하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들'의 '행동분석'과 그에 관한 긍정적 행동지원을 해나가는 커리어를 꿈꾸게 됐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러한 점들을 하나둘 연결해 새로운 지평선을 그리게 된 것. 스티브 잡스가 언급한 'Connecting the Dots'가 그야말로 빛을 발한 순간이랄까.


남편이 일하고 있는 Boston University 메디컬 캠퍼스. ABA라는 새로운 분야에 발을 내딛기까지 가족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방송과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벗어나 새로운 분야에 설 수 있으리라고는 나 역시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보사 기자를 시작하며 언론인의 꿈을 키워왔고, 졸업직전부터 방송 기자로 취직, 그 후로도 지역 MBC를 두 곳 거치며 아나운서로 꽤나 오랜 시간 이름표를 달아왔던 나였다. 결혼한 다음 신혼의 터전이 미국이기는 했지만, 보스턴에서도 커뮤니케이션 석사 유학을 했으니… 방송사 직원의 위치만 벗어났을 뿐, 사실상 나라를 떠나도 영역은 같았던 셈이다. 아나운서의 삶 그 이후 역시, 꼭 현직 '뉴스앵커'가 아니더라도 뉴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그 언저리일 줄만 알았던 거다. 아무리 N잡러의 시대라도 해도 대학에서 미디어 분야의 커리어를 꿈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 혹은 스피치 강의를 종종 담당하는 강연자 정도로만 커리어가 '응용'될 거라고 생각해 뒀었다. 정말 '응용행동분석'을 시작할 줄이야. 내가 ABA의 세계의 일원이 될 줄이야. 내가 정말 ABA Therapist의 길을 걷게 될 줄이야!


나 역시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새로운 분야에 설 수 있으리라고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난 이후, 새로운 커리어에 대한 열정과 계획이 좀 더 선명해졌다. 소위 코로나 시국에 태어나 마스크가 모든 것을 덮은 세상에만 익숙한 아이들의 발달 지연 이슈가 크게 떠오르는 요즘 아니던가. 실로 언어치료나 소아정신과를 찾는 가정의 수요가 급증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코로나 백신도 나오기 전, 당시 미 대통령 트럼프가 very very painful week라고 언급한 2020년 상반기에 첫째 아이를 낳은 나로서도 절절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두 살 터울의 둘째 아이를 낳고서도 여전히 코로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국이라니! 엄마가 되고 보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들과 그 품의 아이들, 그 모두의 걱정과 고민이 꼭 하나같이 내 일 같다.


10년 남짓의 시간 방송만 하다가 새로운 분야에 풍덩 뛰어드는 용기. 제2막을 여는 한 가운데 Applied Behavior Analysis.


그쯤 하여 내게 우연히 다가온 ABA라는 분야는 운명 같았다. 전직 아나운서로서, 현직 남매맘으로서 가족들의 든든한 격려 아래,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최적의 커리어가 아니었을지! 특수교육 커리어는 1도 없는 나였기에, 스스로도 종종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지만 남편이 곁에서 북돋아 준 격려가 용기를 내는 데 대단한 한몫을 했으니... 석사시절 미국에서 ABA 인턴을 해 본 경험이 있던 남편의 경험담 하나하나가 소소한 힌트가 됐다. 바로 이 지점, 전혀 다른 새 분야에서 제2막을 열어보겠다는 새 꿈을 꾸는 서막이었다.


전직 아나운서로서,
현직 남매맘으로서,



어찌 보면 새로운 제2막의 커리어 역시 커뮤니케이션을 뼈대로 한다. 전통적인 미디어, 지상파 방송국에서 수많은 시청자들과 커뮤니케이션했다면, 새로운 세계 안에서는 ABA를 통해 발달지연 이슈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가정들과 꾸준히 소통해 나간다. 아이들의 관심과 흥미를 따라가며 그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그들과 연결고리를 쥔 모든 이들과도 긍정적 행동지원을 위해 또 긴밀히 커뮤니케이션한다.


“10년 남짓의 시간, 시청자들을 향해
Broadcasting 했다면,
이제는 아이들의 발달 이슈로 걱정 고민이 뒤엉켜 힘들어하고 있는 가정들과
Narrowcasting 하고 싶습니다.

그 엉킨 실타래를 차분히 풀어가는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는
다리가 되고자 합니다.”



얼핏 보면 닮았다. 아나운서가 왜 되고 싶냐는 방송국 입사 면접의 단골 질문에 대한 답변과 말이다. ‘시청자와 세상을 잇는 다리가 되고 싶다’ 던 20대 초반의 아나운서는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꿈꾸고 있다. 현재 응용행동분석 전문가 (ABAS) 코스워크를 모두 수료하고 한 기관에서 ABA 치료사로 수련하는 중. 좀 더 나아가서는 남편이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 Autism 관련 Graduate Certificate도 취득하고 싶고, 미국에서 ABA 국제자격증(BCBA) 도전에도 욕심 내보고 싶다. 물론 두 아이의 엄마다 보니 ‘육아’라는 우선순위 앞에 내 욕심껏 커리어만을 내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차근차근 새 커리어의 세계에 배를 띄워가자는 생각이다. ABA가 내게 물들듯 자연스레 찾아왔듯이! 천천히, 그러나 깊고 묵직하게, 힘 있게 제2막을 열어가볼 작정이다.


내 나이 마흔에는
인생 제2막을 열겠어

20대 후반부터 제법 또렷하게 다짐해왔던 생각이다. 인생1막과 2막이 어찌 전혀 다른 작품이겠는가. 2막을 올리고 묵묵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제1영역이었던 방송과도 맞닿는 접점이 있으리라. 1막의 영역은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2막이 진행되는 중에도 언제든 틈틈이 우연을 가장해 스르륵 찾아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ABA 세계에서도 방송과 강연, 저술의 기회를 마주할 지도 모를 일. 그렇게 1막과 2막이 은근히 콜라보하며 또다른 환상의 3막을 꾸려갈 의미심장한 점들을 찍고 있을지도! 그 점들이 새로이 모여 상상 그 이상의 ‘큰 그림’을 그려나갈 지도!


아나운서 엄마, ABA 하다
그렇게 제2막을 열다


응용행동분석 분야를 본격적으로 공부해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여전히 초보 치료사의 길을 걷고 있지만 방송에서 특수교육과 행동분석의 영역으로 넘어오며 ‘마치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았던’ 새 영역에서 짧은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생각과 고민들을 비로소 하나씩 풀어보고자 한다. 이미 작년부터 하고픈 이야기는 많았으나 이 분야를 적어도 1년은 겪어보고 써 내려가자고 스스로에게 소소히 약속했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10년의 아나운서 라이프, 결혼 후 보스턴에서의 미국유학 + 미국육아 이야기, 그리고 내 인생 모든 점들을 이어 새로운 장에 도전하는 순간순간들, 브런치라는 도화지에 서서히 스케치해나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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