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름만 말해도 모두가 아는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게 된다면, 이라는 바람이 현실성 없는 공상 같게만 느껴지던 날의 풍경.
난생처음 와보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지도를 보며 길을 걷는데, 2시가 넘어가는 평일 한낮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인적이 드물었다. 구색만 갖춘 곳곳의 가로수며 화단은 싸늘한 공기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거대한 회색빛 도시. 그때는 몰랐었다. 내가 앞으로 다니게 될 회사 또한 이토록 회색빛으로 음울하리라는 걸.
회사가 좋아서 그 도시가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제껏 다닌 회사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회사가 위치했던 지역이 떠오른다. 서울 강남의 '강남역' '신사역'부터 서울 중구의 '충무로역' '시청역' '동대입구역'까지. 직장인으로서의 지난날을 기억할 때면 함께했던 팀·동료나 프로젝트 못지않게 지역에서의 추억들도 함께 떠오른다.
충무로 근처, 남대문 시장 일대에서
충무로의 골목골목 안에 있던 오래된 가게들이며 온 세상 책이며 출판물은 다 찍어낼 것 같던 인쇄소. 긴 점심시간을 빌미로 걷다 걷다 보면 나오는 명동이며 을지로, 남대문, 종로 곳곳에선 얼마나 많은 삶의 모습을 봤던가. 한 편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 소리가 터져 나오던 시청역 일대는 조금만 걸어가면 덕수궁 돌담길이 나오곤 하는 한적함이 있었다. 승용차보다 많은 버스들과 가장 이른 새벽에도 숨 가쁘게 움직이는 기자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서울 한 복판의 생명력을 즐겼다.
신사는 또 어떻고. 매 점심시간은 나만의 여행 시간이었다. 걸어서 5분 거리 가로수길 근처에는 이 비싼 땅값에 수익은 날까 싶은 색색의 작은 가게들이 넘쳐났다. 브루클린이 좋아서, 파리가 좋아서, 바르셀로나가 좋아서 만든 것 같은 이색의 가게들은 물론 거대한 패션브랜드들의 쇼룸이 한 발짝만 더 다가가면 있었다. 잡지가 사양산업이 되면서부터 떠오른 음식 인플루언서 ‘푸디’들이 발 빠르게 찾는 타코집이며 라멘집도 다 압구정에 있었다. 퇴근 후는 또 어떻고. 길거리가 무신사 스튜디오의 런웨이가 된 듯 저마다 짧은 스포츠헤어와 스키니 한 상의, 또는 멋진 비니와 두터운 점퍼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모적이지만 그래서 더 빛나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출처 = 언스플래쉬, rawkkim
강남-역삼 부근에선 늘 치열함을 엿봤다. 이곳에서 일한 기간 중 반절은 퇴사를 종용당하고 업무가 끊겼지만 ‘실패자’라는 낙인은 싫어 꾸역꾸역 출근하며 어떻게라도 동료들에게 기여하러 나오던 시기였다. 나 자신을 놓고 싶지 않아 회사 근처에서 퇴근 후 학원을 끊어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강남에 있었더랬다. 하루 종일 강남과 역삼 부근에 있으며 본 삶은 무엇보다 치열했다. 가장 아침에 나오는 직장인들부터 어스름해질 때 즈음 불을 밝히는 주점들, 배낭을 둘러메곤 학원에서 나오고 독서실로 들어가는 학생들, 나처럼 퇴근 전후로 무언가를 하겠다며 다시 학원으로 또 다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까지. 강남은 열심히 산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도시였다.
회사에 정을 붙이지 못하니, 도시도 싫어졌다.
그런데 이곳은 어쩐지, 네 계절을 깊숙이 즐기고 오랜 시간 걷더라도 위 열거한 지역들처럼 쉽게 친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단 일주일 만에 대기업 계열사가 위치한 이 지역이 지겨워졌다. 개성보다는 실용에 초점을 맞춘 엇비슷한 옷을 입은 직장인들. 11시부터 밀리는 점심시간. 하나같이 굳어있는 표정, 다양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한식뷔페' 일색의 식당. 사람에 비해 지나치게 좁은 인도, 아침 7시와 오후 4시부터 밀리기 시작하는 가혹한 도로환경까지. 입사한 지 반년 즈음이 지나, 전 직장의 동료를 만나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토해내며 문득 이런 이야기도 했더랬다.
"드라마 촬영장 있잖아요. 프레임에 잡히면 너무 근사해서 현실 같지 않은, 잘 만든 세트장. 그 세트장 뒤에도 공간이 있겠죠? 대비되어 더 허름하게 보이는 나무 가벽과 먼지덩이에서 걸어 다니는 엑스트라가 된 기분이에요."
비단 환경 때문이었을까?
사실은, 이 회색빛 도시의 분위기만큼이나 불친절한 대기업 계열사 사람들의 태도가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경력 계약직 한 명을 대하는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있었다. 점심 식사메뉴마저 선택권이 없었고, 요구하는 업무량에 비해 이전 프로세스를 알려줄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보였다. 대기업 계열사라는 명칭에 걸맞게 복잡한 내부 시스템과 페이퍼 업무들은 시간과 상관없이 밀려들어왔다. 마치 회사가 위치한 도시의 풍경처럼 싸늘하고 불친절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적응'의 문제라며 노력할 수 있었다. 가장 질렸던 것은, 그들은 나를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대하며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견고한 그들의 세계에서 나는 '굴러들어 온 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