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노창희 칼럼}
국내에서 8월 15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였던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의 성공을 주도하고 원자폭탄 투하 이후에 발생한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면서 겪었던 고뇌를 중심으로 한 전기 영화다. 원자폭탄 투하 이후에는 뒤로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변화가 발생했고 이를‘오펜하이머의 순간(Oppenheimer moment)’이라고 부른다. 최근 놀란이 인공지능으로 인해 또 다른 ‘오펜하이머의 순간’이 올 수 있다고 인터뷰하면서 이 용어가 다시 소환되고 있다(Catherine Bauer, 7. 22. Movie director Christopher Nolan warns of AI's 'Oppenheimer moment'. NBC News).
‘오펜하이머의 순간’이 은유하는 것은 기술 발전에 따라 통제 불가능한 위험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 글에서 ‘오펜하이머의 순간’이라는 용어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의미는 ‘비가역성’이다.
코로나 이후 디지털 대전환이 가속화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영상산업도 큰 변화를 겪었다. 동영상 소비는 OTT를 포함한 디지털 매체가 중심이 되었고, 극장 관객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1월부터 7월까지 극장을 찾은 관객 수는 1억 3,124만 명이었는데 2023년에는 동기 대비 절반을 조금 웃도는 수준인 7,267만 명이 극장을 통해 영화를 봤을 뿐이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2023). <2023년 7월 한국 영화산업 결산>.). 2022년 12월에는 유료방송 도입 30여 년 만에 가입자가 처음으로 감소했다. 이와 같은 지표들을 보면 코로나와 코로나가 가속화시킨 디지털 대전환은 미디어 산업에 비가역적인 변화를 가져온 듯하다. 그렇다면 미디어 산업에도 ‘오펜하이머의 순간’이 찾아온 것일까? 필자의 의견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변화는 ‘전환’과 ‘지속’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한다. 디지털 매체 위주로 미디어 생태계가 재편되고 있지만 여전히 레거시 미디어들은 생태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코로나 기간 동안 국내 OTT 시장은 가입자와 이용률이 크게 증가했지만 큰 폭의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국내의 경우 티빙, 웨이브 등 OTT에 공격적으로 투자해온 사업자들은 모기업이 레거시 방송 미디어 사업자다. 이들은 전환에 대비하여 OTT 영역으로 진출했지만 OTT 영역으로의 전환도 레거시 영역에서의 지속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K-콘텐츠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지만 내수시장은 협소한 내수시장, 늘어나는 콘텐츠 제작비 등 구조적 문제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 직면해 있는 복합적인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고 나아갈 지향점을 모색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앞서 극장 관객 수가 감소하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영화는 여전히 가장 뛰어난 제작 인력과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영상산업의 총아다. 올여름 많은 기대를 모으며 극장에 개봉된 작품 중에 관객 동원과 비평 측면에서 두드러진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오펜하이며’,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밀수’, 엄태화 감독이 연출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개봉 후 20일 만에 300만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은 400백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에 대한 여전한 충성심, 국내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로는 이례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성공은 영상 제작자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할 수도 있다. 코로나 이후 ‘범죄도시’ 시리즈와 같이 오락 위주의 콘텐츠가 성공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제작자들 입장에서 놀란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불편할 수도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성공은 대한민국의 이용자는 역시 예측하기 어렵다는 탄성을 자아낼 만하다. 제작자 입장에서 대한민국 이용자들은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토록 까다로우며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해내는 이용자 덕분에 대한민국의 미디어 산업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어려운 이용자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 온 미디어 산업 종사자들의 노력도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미디어 산업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용자의 역동성을 인정하고 산업에서 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앞서 미디어 산업에 ‘오펜하이머의 순간’이 도래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디지털 대전환 속에서도 OTT와 같은 디지털 매체와 방송과 같은 레거시 미디어가 생태계 내에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공존은 반드시 필요하다. 유료방송의 성장은 콘텐츠 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고, 콘텐츠 산업은 유료방송 가입자 확보의 가장 중요한 자원 역할을 해왔다. 국내 OTT에 제공되는 많은 작품이 레거시 방송사업자가 제작한 콘텐츠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콘텐츠, 유료방송, OTT는 생태계 내에서 같이 발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2019년 5,093억으로 정점을 기록했던 영화 VOD 매출은 TV VOD의 하락(2019년: 4,059억 → 2022년: 2,530억)으로 2022년에 4,539억으로 떨어졌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2023). <2022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인터넷 VOD 매출이 같은 기간 930억에서 1,699억으로 증가했지만 TV VOD 감소분을 상쇄하기는 부족한 상황이다. VOD 매출은 영화, 콘텐츠, OTT, 유료방송 등 전체 생태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한쪽의 변화가 다른 영역의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대전환은 생태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 간 연계성을 높이고 있으며, 특정 영역의 성장과 다른 영역이 차지하는 점유율을 낮출 수는 있지만 전체 생태계 간 관련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미디어 산업의 변화는 계속되겠지만 ‘오펜하이머의 순간’과 같이 완전히 단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전환의 힘과 지속의 힘이 때로는 대립하며 때로는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특정 영역의 진흥과 더불어 전체 미디어 생태계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다. 전환을 위한 상상력과 지속을 위한 고민이 동시에 필요한 시점이다.
출처: https://www.ajunews.com/view/20230830085543362
이 글은 같은 제목으로 8월 31일에 <아주경제>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