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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환 Jan 12. 2019

울어야 할 때 울게.

목수J 작가K(4회)


지난 가을, 한꺼번에 일이 몰려

몇 주 동안 밤샘작업을 했었다.

그래서였는지 원래 갖고 있던 목디스크가 악화되더니

6,7번 경추 사이의 디스크가 터져나와

목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게 됐다.


비슷한 시기에 J는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대리석 탁자에 부딪혀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아프지 않습니까? 엄청 아플텐데.”

“아프죠, 엄청.”

“전혀 그런 사람처럼 안 보입니다.”


J와 의사와의 대화가 이랬다고 한다.

그는 실제로 통증을 잘 참는다.

당시 우리가 만났을 때도

내가 목의 통증을 호소하면 그는

“그러지 말아. 끙끙거린다고 조금이라도 아픈게 나아지니...

괜히 주변 사람들만 불편하게 만들어.” 했다.

통증을 잘 못 참는 나로서는 섭섭했다.

나는 그에게 퉁퉁댔다.

“통증의 정도는 사람들마다 다 다른 거야.

나라는 인간을 좀 받아들일 때도 됐잖아?”


J의 이런 태도는 오래전부터

그를 마초라고 생각하게 했던 이유가 됐다.


그러나 지난 14년 간 지켜본 바,

그는 단지 징징대는 걸 싫어하는 것 뿐이었다.

이건 남자다움이나 마초와는 다르다.

‘징징댄다고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징징대지 않는 것.’

나아가서는,

징징대면서도 바뀔 생각도, 바꿀 의지도 없는 사람들,

다 아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

이것은 마초가 아니라 '예민한 사람'의 전형이다.


더 가질 수 없다고 징징대고

사회가 썩었다고 징징대고

아이들 키우기가 힘들다고

마누라가 지겹다고

징징대기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은

소음이다. 잉여다.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가

나약한 인간이라 생각해왔다.

선천적으로 덩치가 작고

근력이 약하고

마음이 좁고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의 나였기에

당연한 판단이었다.


또 나는 예민했다.

나의 나약함을 비난하는 목소리에 예민했고

불편해진 환경의 변화에

나를 둘러싼 억압의 강도에

예민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아무데서나 드러내지 못했고

대부분의 경우 숨겨야 했다.


오랫동안 나에게

나약함과 예민함은 한 단어였다.


기성 사회는 남성들에게

혹은 어른들에게

나약함을 경계하고

지나치게 예민해지지 않도록 억압한다.


‘모든 종류의 고통’에 대해

견디고 강해지는 것이 곧 경쟁력이라고   

선전한다.

적당한 비난과 처벌, 혹은 칭찬과 보상을 줘가면서

그들은

강하고 무딘

어른과 남자를 만든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우리가

‘예술가와 정반대 자리’에 서길 원했던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단련시킨 고통은

다름아닌 '부조리'였기 때문이다.


J를 마초라고 생각했던 당시 그는

종종 나를 헷갈리게 했는데,

그는 뜻밖의 상황에 울음을 터뜨리곤 했던 것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는 예술가의 자리에서

당연한 상황에 울었던 것뿐이다.


세상 모든 종류의 고통에

자연히 통증이 따를지는 몰라도

모든 통증에 울 필요는 없다는 것과

반드시 울어야 할 통증이 따로 있다는 것을

J는 아무말 없이 말한다.


당신들이 징징대는 것과 예술가의 울음은 다르다는 것을,


예민하고 나약하지만

반드시 울고 반드시 소리치는

예민하고 나약한 사람을 대표하여

우리는 너희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해줄게 이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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