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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Aug 04. 2020

23. 그 악몽의 끝은

  “저 혹시 의사소통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개비의 핸드폰 너머에서 대사관 직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나 우리의 기분이 상할까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아니요. 저는 외국에서 살다 온 경험이 있고 오해가 생길 정도의 영어 실력이 아니에요.”

  개비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개비의 말에는 얼핏 황당함이 묻어나왔는데 그도 그럴 것이 호스텔 보스와 연락을 마친 대사관에서 우리에게 전해준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두 명 빨래에서 베드버그가 왕창 나왔어요.’

  ‘그들이 당장 빨래를 하라며 우리를 모욕했어요.’

  ‘소리를 치며 무례하게 굴었어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차분한 어조로 빨래를 부탁한 우리가 모욕적으로 빨래를 해놓으라고 소리친 안하무인이 되어있었던 거다. 

  오, 오해하지 말길. 맹세하건대 우리는 그녀와 그녀의 직원들을 모욕적으로 대한 적도 소리를 지른 적도 없다. 언제부터 ‘Could you’라는 표현이 모욕적인 표현이 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2년 넘게 한국식 영어를 배우며 정중하게 부탁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는데…. 저게 모욕적인 표현이라면 전국의 모든 교과서를 뜯어고쳐야 하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호스텔 보스의 거짓말에 박수를 쳐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대사관에서도 도대체 들킬 거짓말을 왜 하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일단 두 분 정보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건 아닌 것 같으니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아요. 주변 호스텔들에 일일이 전화를 돌려서 두 분 정보를 알렸나 봐요. 일단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다행히도 우리가 가장 우려했던 ‘여권 정보가 인터넷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상황’은 아닌 듯했다. 잠깐만, 그럼 우리 정보를 전화로 하나하나 다 알려줬단 말이야? 그 많은 호스텔에? 그것참 대단한 정성이다.

  어쨌든 대사관과의 통화는 우리가 호스텔 보스를 직접 찾아가 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다음 날, 개비와 나는 아침 일찍 우리에게 친히 끔찍한 기억을 선물해 준 호스텔로 향했다.

  “Go Out!!”     

  호스텔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다른 여행자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중 우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은 호스텔 보스였다. 이내 그녀의 비명을 내지르는 듯한 외침이 귀를 찔렀다.

  ‘분이라도 풀리게 똑같이 소리 지르며 화를 내.’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소리를 지르며 화내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혹시나 소리를 높이거나 했을 때 힘들어지는 건 두 분이니까 조심하시고요.” 하지만 걱정이 가득 담긴 대사관의 조언을 머릿속에 새기며 이내 마음속에 이는 충동을 쫓아냈다.     

  “우리는 단지 이야기를 하러 왔을 뿐이에요.”

  “Go Out!!”     

   ‘왜 우리가 베드버그를 몰고 다닌다고 거짓말한 거야? 왜 우리 동의도 없이 우리의 여권 정보를 뿌린 거야? 왜 대사관에 우리가 너에게 소리를 지르며 모욕을 줬다고 거짓말했어?’

  묻고 싶은 것, 따지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그녀는 나가라는 외침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아무리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해도, 싸우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해도 요지부동이었다. 호스텔에서 묵는 여행자들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여행자들에게 보란 듯이 “올라!”하고 밝게 인사했다가 우리를 쳐다보고는 얼굴을 굳히기를 반복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거야.”     

  꺼지라는 그녀의 외침에도 우리가 계속 서 있자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강수를 뒀다. 경찰에 연락하겠다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던 것으로 보아 진짜 경찰에 전화한 건 아닌 듯 보였으나 그런 그녀의 태도에 우리는 그녀에겐 그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그래, 그녀와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 감정 낭비였다.     

  “그만, 그만 나가자.”

  그녀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호스텔을 나오자마자 그동안 쌓인 억울함에 다시금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런 취급을 받고 똑같이 화조차 내지 못하다니….

  호스텔 바깥의 벽에 기대 감정을 추스르는데 개비의 핸드폰이 울렸다. 대사관이었다.     

  “혹시 호스텔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방금 그 호스텔 보스에게 연락이 왔는데 두 분이 호스텔에 와서 소리지르며 난동을 피우고 갔다고….”     

  아, 정말이지 끝까지 거짓말이구나.      

  이제는 화를 넘어서 허탈할 지경이었다. 축하해, 그라나다. 내 인생 최악의 도시로 임명된걸. 아, 생각해 보니 예약했던 걸 환불받아서 부킹닷컴에 후기도 못 남기잖아?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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