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 남편 옆에 누워 내가 쓴 글을 읽어 준 적이 있었다. 어릴 때 내 얘기로 장난감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어릴 때 부모님이 그랬어. 그런데 그냥 그러려니 했어."
라며 남편이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남편은 어릴 때 바쁜 부모님이 잘 돌봐주지 못했다고 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은 언제나 집에 안 계셨다. 막내인 남편은 형, 누나들과 시간을 보냈다. 5살 때 혼자서 계란프라이를 해 먹을 정도로 뭐든 스스로 했다고 했다. 집 형편이 좋지 않아 자기 몫의 장난감도 없었다.
남편과 나는 많은 부분이 닮았다. 그런데 결정적인 부분이 다르다. 남편과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남편은 부모님을 이해했다. 부모가 되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데, 나는 아이를 키울수록 부모님이 미웠다. 내가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자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대했는지 알 것 같았으므로.
우리 집은 부유했다. 어린 시절, 부잣집 밥 먹듯 굶었다는 아버지는 돈에 대해 집착이 심했다. 그래서였는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돈을 많이 벌었다. 일을 하고 돌아오면 항상 힘들어했고 그 화살은 가족들에게 향했다. 자주 하는 말씀은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처자식 먹여 살린다고 뼈 빠지게 고생하는데."
아버지의 사업은 점차 커졌다. 혼자서는 힘들어진 규모에 어머니가 일을 도왔다. 그럴수록 부모님은 자주 싸웠다. 내 기억 속 남아있는 부모님의 모습은 매일 밤 통장을 보며 이 돈을 어디다 썼는지 묻는 소리 지르는 아버지와 엄마의 악다구니였다.
부모님은 본인들의 삶을 항상 버거워했다. 일이 늘고 돈은 많아졌지만 마음은 항상 허덕였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밥 굶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돈이 어디로 샐까 걱정이었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간섭과 통제를 못 견뎌했다. 엄마의 삶이 힘드니 자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삶을 보호하는 데에도 온 신경을 다 써야 했으니까. 그런 와중에 엄마는 힘을 짜내 동생에게 남은 신경 일부분을 썼다. 거기에 내 몫은 없었다.
나는 엄마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해야만 겨우 눈길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동생은 아무 대가 없이 받았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은 나는 말 잘 듣고 착한 아이, 요구가 없는 아이, 혼자 알아서 잘하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성인이 된 후 한 번은 동생과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우리 엄마는 그리 사랑이 많았던 엄마는 아니었던 것 같아."
내가 말했다. 그러자 동생이
"나는 엄마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하고 답했다. 나는 어떤 말보다 그 말이 참 슬펐다.
나와 남편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었다. 남편은 형제들과 비슷한 정도로 사랑을 받았고, 나는 차별적이고 조건이 붙은 사랑을 갈구하며 받았다.
심리서를 종종 읽는다. 어떨 때는 다 내 얘기 같고 어떨 때는 하나도 맞는 게 없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세상에 혼자 있는 듯한 외로움을 느낀다. 나는 차별받고 자랐다는 마음을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살았다. 어떤 일을 당해도 나는 차별받고 자란 사람이니,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렇게 당하고 싶진 않다는 게 지배적인 마음이었다. 그런 것이 마땅한 줄 알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 줄 착각하며 살았다. 그런 마음이 내 안에서 자존감 한 부분을 비대하게 키워갔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내 속이 곪아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아파만 했다.
나는 그렇게 부당하게 취급받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고, 이것이 나의 잘못이나 결함에서 기인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그 나이에 알맞게, 형편없이 미숙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허지원
엄마는 자신의 삶을 보살피느라 딸인 나의 삶까지 봐줄 여유가 없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살아냄이 힘겨웠고, 자식을 다루는 데 미숙했다. 한때는 원망했고, 분노했다. 나는 이것을 더 이상 아프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엄마의 삶이 힘든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엄마 속을 썩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신경 쓰이지 않게 해도 여전히 엄마는 불행해했다. 그때 내가 어떤 노력을 했더라도 엄마를 그 삶에서 구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아무리 삶에 지쳤더라도 나 역시 그런 취급을 당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내 나이답게, 엄마는 엄마 나이답게 미성숙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다. '가는 곳마다 주체가 돼라, 지금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이다'라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시대 임제 선사의 언행을 기록한 임제록에 나오는 말이다. 상황과 조건이 변하는 환경에서도 주도적으로 행하라는 것이 수처작주이고 서 있는 곳에서 해결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 입처개진이다.
나는 더 이상 부모를 원망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기로 했다. 상처받은 과거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의 고유성이 만들어졌다. 나의 장점과 단점, 스스로 정말 좋아하는 부분과 약점 모두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다듬어지고 깎여졌다.
과거는 더 이상 아무런 힘을 갖지 않는다. 나는 이제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 됐고 과거의 상처받은 나는 이제 내가 보듬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는 부모오답노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를 양육함에 있어서 해서는 안될 몇 가지를 깊이 체득했다. 이것이 엄마로서 내가 가진 큰 힘이 됐다.
내가 주체가 되어 사는 삶, 그리고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수처작주 입처개진을 떠올리며 지금, 현재를 오늘도 다시 살아간다.